10월17일 미련한 마음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10-17 06:37:51    조회 : 252회    댓글: 0

▣ 2018년 나해 10월17일 수요일
[(홍)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갈라티아서 5,18-25
복음 루카 11,4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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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2018년 니해 10월17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연수원에서 좋은 점이 많습니다. 여러 교구의 신부님들과 친교를 맺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을 보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새미 은총의 동산에서 매일 기도하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가장 큰
즐거움은 연수원의 본질인 ‘배움’입니다. 지난주에는 ‘몸의 신학’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몸의 신학은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정립한 신학입니다. 교황께서 가르치셨고, 성인이 되셨기에
교도권의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몸의 신학의 출발점은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의 몸은 아담의 원죄를 시작으로 교만과 욕망으로 하느님의
모상을 잃어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셨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 표징, 행동으로 우리의 몸이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지친 삶의 위로를 받았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아픈 몸은 치유되었고, 악에 물든 영혼은
하느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받아 모시면 우리들
또한 주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몸은 죽을지라도 다시
살아 영원한 삶에로 초대 받을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봉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살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와
봉사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혼인이며 가정입니다. 혼인의 참된
의미를 알고, 가정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가꾸도록 도와주는 것이 몸의
신학입니다.

몸의 신학은 우리의 몸은 모두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기에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체의 장애가 문제될 수 없습니다. 정신의
장애가 문제될 수 없습니다. 피부색이 문제 될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문제 될 수 없습니다. 직업과 능력이 문제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몸으로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몸의 신학은 그러한 관점에서 저항할 수 없는, 말을 할 수 없는 태아의
낙태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피임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낙태와 피임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소중하고,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거룩한 존재임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몸의 신학이 소중하기에 몸의 신학을 지키려하는
이들을 보호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미혼모들이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지켰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들을 보호하고, 자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십니다.
그들이 율법을 강요하지만 지키려 하지 않았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도와주지 않고 단죄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물질주의와 자본주의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우리의 몸도 상품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윤의 도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따라간다면 우리들
또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처럼 예수님께 야단을 맞을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의 가치를 이 세상에서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을 따르는 이들을 단죄하기 전에 그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물질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몸은 자본의 도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무의 가지와 몸체를 보기 마련입니다. 예쁘고 화사한 꽃과
맛있는 열매를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모든 나무는 어두운 땅
속에서 양분을 찾아내는 뿌리가 있습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가 바람도
견디기 마련입니다. 가뭄도 이겨내기 마련입니다. 스페어타이어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이런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식당 종업원이 화재를 진압하고 식사를 하러 온 소방관에게 고맙다는
쪽지를 주었고, 음식 값은 자신이 대신 냈다고 합니다. 그 종업원의
작은 선행이 알려져서 식당에는 많은 손님이 왔다고 합니다. 종업원은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가 있었는데 아버님을 위한 장애인 전용 차량도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종업원의 어려움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그전에 선행을 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선행을 보시고 평가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씨앗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어느 곳에선가 자리를 잡습니다. 어디에 자리를
잡을지는 바람만이 알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많은 씨앗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뿌리를 내리고, 꽃과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선행도 그런 것 같습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가슴에 위로와 용기의 꽃을 피울 것입니다. 절망과 근심 중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과 기쁨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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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위선자 율법주의자들/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0월17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11,42-46: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소홀히 하는구나

율법의 근본정신을 외면하며, 결과적으로 계명을 어기고 그래서
율법을 어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42절)고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같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계명들만
철저히 지키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쳤다. 자기들에게 편한 것만 찾아
지켰으니 나머지 계명들은 지키지 않은 것이니,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42절)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은 또한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바리사이들의
교만과 허세를 꾸짖으신다. 그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44절)이라고
하신다. 그들은 겉꾸밈으로 자기를 감추고 그럴듯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인다. 입으로는 옳은 말을 늘어놓지만 속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마태 23,27참조).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서 남들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교사들이 많다. 그러니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시편 5,10)이라 한 것 같이 그들은
무덤이다.

위선이라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역겨운 것이다. 위선자는
겉모습과 말로 자기를 감춘다. 좋은 평판을 듣는 행위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것을 감추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찬미하고 칭송하는
일에는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만 지키라고 요구한다. 그 위선은 오래
감출 수 없다. 잠깐 동안은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머지않아 본색이
드러난다.

이렇게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자 율법 교사들이 이에 대해 분개한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45절)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까지 책망하신다. 사실, 그들은
바리사이들과 한통속이었기 때문에 책망을 들어 마땅하였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자기들까지 모욕하는 것으로
들렸다면 그들 또한 바리사이들과 똑같은 사람들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나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 이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 때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44절)고 엄한 책망을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주의자 되지 않고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청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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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힘없을 땐 바리사이, 힘
있을 땐 율법학자

2018년 나해 10월17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힘없을 땐 바리사이, 힘 있을 땐 율법학자>

복음:루카 11,42-46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학생 때 저는 바리사이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성인이 되려고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함께 산 사람들과의
추억이 별로 없습니다. 기도하고 공부하느라 모든 시간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심지어 한 동기에게 혼자 하늘나라 갈 거냐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1년 동안 함께 공부한 수도회 신학생을 신부 되어서
봤는데 못 알아보았습니다. 함께 1년 동안 같은 반이었는데도 친분을
쌓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그 신부가 같은 반이었다는 것을 말해서
알았습니다. 저는 누가 봐도 기도 잘 하고 공부 잘하는 모범
신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킬 건 다
지켰지만 그러면서도 힘들어하는 신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리사이는 그런 사람입니다. 모든 율법을 다 지키면서도 정작 중요한
사랑은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아마도 일반 신자들은 결혼해 자녀를 낳기 전에 바리사이로 살아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바리사이는 무언가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녀로서는 열심히 살지만 부모를
심판합니다. 자기가 부모가 되면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학생이라면 선생님을 심판하는 학생이 바리사이입니다.

직장에서는 말단 직원들이 바리사이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정말 많은
일을 하면서 시켜먹기만 하는 상사를 비판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키지만 남을 판단하며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자신도 죄인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남 탓만 하니 정의롭지도 못한 것입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이 막상 힘을 얻어 누군가 위에 서면 율법학자로
바뀝니다. 제가 사제가 되고난 다음부터는 율법학자였습니다.
율법학자는 타인에게 율법을 강요하는 위치에 선 사람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이고 직장에서는 상사입니다. 자신도 부족하면서 또
남을 가르쳐야 하는 위치에 서니 자신도 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게 됩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학생 때는 사제들을 판단하며 가난하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돈도 많이 받고 선물도 많이
받으며 가난을 잊어갔습니다. 주위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신자들이 잘 해 주어서,
혹은 사목 상 어쩔 수 없다고 자기합리화를 했습니다. 은근히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들으라고 강론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은
부족함 없이 살며 나눔과 가난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의
상징으로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회칠한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시체가 들어있는 무덤으로 여기는데 본인만
모르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너나 잘 해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남 신경 쓸 에너지 있으면 자신 먼저 들여다보라는
말씀입니다. 자신 먼저 들여다보되 ‘사랑’에 집중하라는 말씀입니다.
내 안에 사랑이 가득차면 바리사이가 되지도 않고 율법학자가 되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남을 심판하지 않고, 또 사랑은 강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이 될 때 바리사이, 율법학자에서 벗어나
참다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내 안에 죽은 시체나, 뱀, 혹은
자아로 가득 차 있는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만으로 가득 차
있는지 항상 살펴야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만 하고
싶다면 이미 그 안에 사랑이신 하느님이 들어계신 것이고 그래서
무덤이 아닌 생명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무덤 아니면
성전입니다. 이는 그 안에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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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10월 17일 (수) - 미련한 마음

오늘은 “미련한 마음”에 대해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 말씀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아니한다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없다고 하고 또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두 번째 세
번째로 항상 미루어내는 모습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서 알지만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 귀하게 만들어주신 그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오히려
모든 생각들이 자신에게 유익한 것만 먼저 생각하는 것 참 허망한
생각들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주님 앞에 돌아와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뜻대로 살겠노라고 고백하는 자! 하나님이
찾습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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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회개에로 이끄는 예수님의 사랑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0월17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루가11,42-46) 

회개에로 이끄는 예수님의 사랑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이에게는 불행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히브12,5).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가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가11,46)는 주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은 의인처럼 보인 죄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죄인처럼 보인 의인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 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 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12,11). 회개에로 이끌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을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 나를 꾸짖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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