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7일 연중 제27주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10-07 08:52:19    조회 : 237회    댓글: 0

▣ 2018년 나해 10월7일 [(녹) 연중 제27주일]

제1독서 창세 2,18-24
제2독서 히브리서 2,9-11
복음 마르코 10,2-16

**********
◈ [서울] 연중 제27주일

2018년 나해 10월7일 연중 제27주일

서울에 있을 때는 잘 몰랐습니다. 제주도에 머물면서 태풍이 자주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마트폰의 영상을 통해서 바람의 방향을
보았습니다. 한라산에 막힌 바람은 한라산의 양 옆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영상으로 바람의 방향을 보는 것도 신기했고, 한라산이
높은 산이라는 것도 실감했습니다. 한라산을 양 옆으로 흘러간 바람은
한라산을 지나면 다시 만나 하나의 바람이 되었습니다.

장애물을 만나서 갈라졌지만 다시 하나가 되는 바람을 보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제 앞에 놓은 장애물 앞에 포기한 적도
많았습니다. 화해하지 못하고 원망한 적도 많았습니다. 마음속으로
무시하고, 비난한 적도 많았습니다. 바람은 제게 원망도, 미련도,
시기도, 질투도 모두 버려버리고 사랑으로 하나 된 마음이 되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앞에는 분단이라는 장애물이 70년 동안 있어왔습니다.
휴전선이라는 장애물이 70년 동안 있어왔습니다. 남과 북의 바람은 이
장애물을 넘지 못했고, 넘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고, 이산가족들의 왕래도 하지 못하였고, 많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분단의 장벽이 너무 높았기 때문입니다. 이념과
사상이라는 장벽이 너무 높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남쪽의 대통령이 백두산엘 올랐습니다. 평양의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였습니다. 백두산의 천지에 한라산의 물을 담았습니다.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고, 경제 협력을 하자고 약속하였습니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은 많지만 남쪽의 바람과 북쪽의 바람은 백두산을 넘어 하나가
되면 좋겠습니다. 북쪽의 정상도 남쪽으로 올 것이라고 합니다.
국회에서 연설도 하고, 한라산도 같이 올라가면 좋겠습니다. 적대감을
버리고, 화해와 협력의 손을 내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5000년 동안
함께 살았던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제주도의 오름에는 억새가 있고,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보는 것은
아름다움입니다. 가을에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단풍을 보러 갈
것입니다. 오늘 저는 단풍이 아름다운 이유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단풍은 ‘여유’를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사람은
단풍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초를
켜고, 마음을 가다듬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습니다.
가족도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단풍의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고, 가족의
행복도 지킬 수 있습니다.

단풍은 ‘멀리’서 보아야 합니다. 단풍을 가까이에서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멀리서 단풍을 보면 색의 화려함도 볼 수 있고, 웅장함도
볼 수 있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단풍도 색이 바란 것이 있고, 벌레가
먹은 것도 있고, 상처 난 것도 있습니다. 가족도 그렇습니다. 서로의
경계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서로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족의 화목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단풍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흘러가는 구름, 흐르는 계곡, 새
소리, 바람 소리, 단풍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아름다운 단풍이 되는
것입니다. 도시에서는 단풍의 아름다움을 보기 어렵습니다. 가족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자녀들이 서로의 자리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김밥의 김처럼 가족의 울타리를 잘
지켜주면 좋습니다. 어머니는 김밥의 밥처럼 자녀들을 돌보면
좋습니다. 자녀들은 김밥의 속처럼 다정하게 있으면 좋습니다.

단풍은 ‘빛’이 있어야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밤에는
단풍을 볼 수 없습니다. 단풍의 아름다움은 오후 2시에서 4시경이
좋다고 합니다. 교회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교회가 부족함에도
하느님 자비의 빛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사랑의 빛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총의 빛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의 은총이
함께 하는 가족은 화목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그런 옷깃을
스치는 인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참으로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천년에 한 번씩 오는 선녀의 치맛자락이 커다란 바위를
스쳐서 그 바위가 다 닮아 없어지는 시간이 지나야 옷깃을 스치는
인연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이 주는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참으로 긴 시간을
기다려 만남을 이룬 것이고, 그런 긴 시간을 기다려 만난 그 소중한
인연인 만큼 아끼고 사랑하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은, 지금 우리의 만남은 치맛자락으로
1000년에 한 번씩 커다란 바위를 스쳐서 그 바위가 닮아져 없어지는
그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기다려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
세상의 시작이시고,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짝 지워주신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결혼의 밑그림

2018년 나해 10월7일 연중 제27주일

<결혼의 밑그림>

복음:마르코 12,2-16

테드(TED) 강연에서 트레이스 맥밀란이란 여성이 나와 결혼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자랄 때 놀이터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곤
했다고 합니다.

“트레이스와 아무개는 나무에 앉아서 키스를 하네. 제일 먼저 사랑을
하고 다음엔 결혼을 하고, 그리고는 유모차 안에 아기가 생긴다네.”

그리고 그녀는 ‘사랑 – 결혼 – 아기’가 인생을 사는 방법이라
여겼습니다. 그리고 성장하여 그 인생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조금 달랐습니다.

사랑 – 결혼 – 이혼 – 사랑 – 임신 – 결혼 – 이혼 – 또 결혼 – 또
이혼 ...

이 여성은 이제 결혼에 대한 꿈을 접고 자기 자신과 결혼한 것처럼
살아간다고 합니다.

결혼을 환상처럼 생각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결혼 생활을 해 보신
분들은 “니들이 살아봐야 알지.”라고 충고할 것입니다. 상상하는
모습과 현실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차이가
있어도 감당할 수 있을 거라 믿고 결혼을 합니다.

혹은 부모로부터 또는 가까운 부부로부터 안 좋은 것들만 너무 봐서
아예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집값 비싸고
애들 키우기 어렵고 서로의 성격 맞추어가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결혼을 포기합니다.

어쨌든 우리 각자는 결혼에 대한 이런 저런 각자의 밑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자신들이 그린 밑그림에 색을 입혀갑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린 밑그림과 현실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면 매우
당혹해합니다. 나중엔 그 밑그림에 집착하여 실패한 그림은 버리고
다시 그려보려 합니다. 그래서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또 자신이
그려놓은 밑그림에 색칠을 시작합니다. 물론 자신이 상상한 결혼생활
그대로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밑그림에
집착하다보면 결코 원만한 부부생활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결혼의 그림은 어떤 것일까요?
완성시킬 수 없는 엄청난 그림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애들 장난하는 그림을 그려나가기를 원하실까요? 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났을 때 그린 사람도 만족하고 보는
사람도 만족하는 그런 그림일 것입니다. 

여기서 꼭 알아야 하는 것은 밑그림을 결혼하는 사람이 그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밑그림을 자신이 그리면 현실의 벽에 부딪혀 밑그림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상황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TED 강연을 한 트레이스 맥밀란은 처음부터 온전한 결혼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상황에서 자라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포주였고
어머니는 그 밑에서 일하던 여자였습니다. 두 사람이 딸을 돌볼 수
없게 되자 트레이스는 여러 집에 맡겨지며 자라야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그녀가 가지게 된 결혼관이란 그저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면 그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 자신이 그린
밑그림에 비해 결혼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자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잘못된 밑그림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녀가
결혼했던 세 남자가 모두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그림을 잘 못 그릴 때는 전문가가 밑그림을 그려준 것에 색만 칠하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결혼을 자신이
계획한다면 반드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어떤 인간도 인생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을 다 고려하여 밑그림을 그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이 우리가 계획한 대로 되어나갈 것이라 믿어서는 안 됩니다.
결혼은 주님이 맺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왜
맺어주셨는지 생각해야합니다. 하느님의 밑그림을 찾아야합니다.
물론 인간의 눈으로 하느님의 밑그림을 한 눈에 알아볼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모르지만 색칠해가는 재미는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그림을 그려놓고 하느님의 엄청난 솜씨에
탄복하기도 합니다. 

영화 ‘노트북’(2004)의 첫 장면은 연세가 많으신 한 남자가 또한
연세가 많아 치매에 걸려 병원에 있는 한 여성에게 책을 읽어주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둘은 사랑하는 부부였지만,
아내가 치매에 걸려서 사랑하는 남편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젊었을
때 남자는 가난했고 여자는 부자였기에 사랑했지만 헤어집니다.
그러나 서로 잊지 못하던 두사람은 7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만나
결혼합니다.

남자는 나이 들어 치매에 걸린 아내가 자신을 기억 못하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 과거의 둘의 사랑 얘기를 책의 내용처럼 읽어주며
애틋한 사랑을 이어갑니다. 결혼한 부부라면 한번쯤은 볼만한 너무나
감동적인 내용의 영화입니다.

결혼을 1년씩 짧게 10번 한 사람이 사랑에 대해 더 잘 알까요, 아니면
10년 동안 부부생활을 한 사람이 더 잘 알까요? 아마 10년을 살아본
사람은 1년씩밖에 살아보지 못한 사람을 보며 부부생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살아본 사람은 10년 산
사람을 바라볼 때 역시 그렇게 볼 것입니다. 끝까지 가보지 않으면
어쩌면 아무 것도 모를 수 있습니다.

영화 ‘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 할아버지 무덤에서 떠나지
못하며 우시는 할머니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들립니다.
할아버지가 젊으셨을 때 속도 많이 썩였던 것 같은데, 그 할머니의
울음의 의미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죽음까지 가보지 않았다면
할머니는 부부생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끝까지
가봐야 하느님의 밑그림이 어떤 것이었나를 알게 됩니다. 

저는 유학을 가기 전에는 ‘유학을 왜 가야하나?’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컸습니다. 그저 기도 잘하는 신부가 되고 싶었고 공부에 대한 큰
신뢰는 없었습니다. 공부를 하고 왔다고 하여 더 훌륭한 신부로 사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학생 때 한 번 나갔다
와 보니 역시 공부는 사제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나가서 박사학위를 따고 오라니 참으로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끝내고 보니 끝까지 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운 것도 배운 것이지만 무언가 끝까지 함으로써 남는 것이 있습니다.
마치 마라톤을 끝까지 한 번이라도 뛴 사람과 계속 중도에 포기만 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의 밑그림을 내가 그리지 않은 것에 감사합니다.
인생은 까보지 않으면 어떤 초콜릿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초콜릿
상자와 같다는 영화 대사가 생각이 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고 모든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만남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내가 그림을 그린다면 그 그림대로 살아야만 하기에
현기증이 날 수 있지만 주님께서 그려놓은 밑그림이 무엇인지
색칠하다보면 삶도 참 재미있고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해도 크게
당황스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그린 그림을 끝까지
함께 해서 완성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모든 관계만큼의 그림을
그려가고 있는 것이고 마지막 때에 그 작품들을 들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 [수도회] 하느님 나라 입국을 위한 전제 조건, 아버지를 향한
전적인 신뢰와 단순한 의탁!
 
2018년 나해 10월7일 연중 제27주일

하느님 나라 입국을 위한 전제 조건, 아버지를 향한 전적인 신뢰와
단순한 의탁!

한 본당 주임 신부님께서 본당 부설 유치원에 가서 한 말씀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조용해져야 한 마디 시작할텐데,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잡기 위해 유치원 원장 수녀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렵사리 분위기가 진정되자 수녀님께서 신부님을
소개했습니다.

“어린이 여러분, 오늘은 주임 신부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좋은 말씀을
해주시겠습니다.” 주임 신부님이 뭔지도 잘 모르는 아이들은 다시
시끌벅쩍해졌습니다. 그때 한 풍채 하시던 신부님께서 무대로
나가셔서 마이크를 잡자 마자, 아이들은 일제히 이렇게 외쳤습니다
“와~뚱뚱하다!” 그뿐이 아니라 몇몇 아이들은 무대 앞으로 나와서,
신기한 표정으로 신부님의 배를 만져보기까지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개념있는 행동이나
예의바른 처신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아직 이성적 사고나 판단
능력보다는,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큽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바라볼 때, 요란스레 예수님 앞에 등장한 어린이들이
무척이나 성가셨을 것입니다. 안그래도 계속되는 복음선포 활동으로
격무와 상습피로에 시달리고 계시는 스승님이신데,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일을 수행하셔야 할 스승님이신데, 개념도 예의도 없는
아이들이 몰려오니 짜증이 났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 가까이에서 군중들의 질서 유지 담당 역할도 수행했었던
제자들이기에, 자연스레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사전 약속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지금 스승님께 몹시 바쁘시니, 빨리 아이들 데리고
돌아가십시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 크게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
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르코 복음 10장 14~15절)

가톨릭 교회는 예로부터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자세로 어린이의 예를 들어왔습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의심이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그런 ‘의심 없는 믿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전적인 신뢰와 단순한 의탁을 하느님 나라
입국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십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든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 입국은 불가능하다거나
요원한 것일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삶의 근본적인
태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 세상과 자연을 향한 강한 믿음과
신뢰심, 깨끗한 마음과 단순성, 솔직함과 겸손함을 지닌다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멀지 않을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 [수도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마르 10, 9)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한상우 신부 강론
 
2018년 나해 10월7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마르 10, 9)

혼인의 여정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혼인은 풋과일이 익어가듯 세월을 통해 영글어갑니다.
아픔 없이 사랑할 수 없듯 서로의 아픔을
껴안으며 혼인은 더욱 깊어갑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혼인입니다.

혼인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알게됩니다.
하느님 사랑은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받아주는 사랑입니다.
내어줌과 받아줌으로 동일체가 되고 공동체가 됩니다.
혼인의 약속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성한 약속입니다.

혼인의 약속은 먼저 하느님을 함께 바라보는 것에서
혼인의 질서는 서로를 건져내는 은총이 될 것입니다.
혼인의 여정이 삶의 의미가 되고 삶의 축복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서로의 곁을 끝까지 지켜주는 사랑과 믿음의
또 다른 이름이 따뜻한 혼인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