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8-10-03 06:40:37    조회 : 233회    댓글: 0

▣ 2018년 나해 10월3일 [(녹)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제1독서 욥기 9,1-12.14-16
복음 루카 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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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2018년 나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연수원 가까이에는 한림성당이 있습니다. 한림성당은 제주도의 오랜
친구이신 임피제 신부님께서 세운 성당입니다. 한림성당에서 제주
교구의 사목 지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주 교구장님이신 강우일
베드로 주교님께서는 ‘생태적 증거의 삶을 사는 소공동체’라는
사목지침을 발표하였습니다. 환경과 생태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주교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의 전환입니다. 많이 늦었지만 아직은 기회가 있다는 생각의
전환입니다. 우리가 불편을 참아내고, 우리가 조금만 늦게 갈 준비가
된다면 우리의 후손들을 위한 환경과 생태계는 보존 될 것입니다.

2018년 대한민국 정부의 주요한 정책은 ‘남과 북의 평화와 화합,
북한의 비핵화와 북한의 경제 발전’입니다. 남과 북의 정상이 3번을
만났고, 겨울이 오기 전에 한 번 더 만날 것이라고 합니다. 경제, 복지,
문화, 예술의 여러 중요한 현안들이 있겠지만 남과 북의 평화와
화합이 이루어진다면 전쟁의 위험이 사라지고, 남과 북의 화합은
경제, 복지, 문화, 예술의 발전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국민이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고, 국제사회가 함께 한다면
한반도의 비핵화와 남과 북의 평화와 화합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가장 중요한 때는 현재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이 순간 만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과거에 상처를
받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걱정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중요하고, 소중한 일을 뒤로 미루고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내가 필요한 사람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중학생 때의 일입니다. 학교에 가려고 버스를 탔습니다. 추운
겨울이었고, 바람도 불었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는데,
버스 안이 너무 좋아서 그냥 지나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학교로 왔습니다. 저는 당연히 내려야 하는지 알았지만
어렵게 잡은 자리가 좋았고, 버스에서 내리면 추울 거라는 생각에
그만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살면서 중학생 때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는 않지만 다른 면에서 중학생 때와 비슷한 행동을 하곤 합니다.

담배를 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17년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지금은 담배를 끊은 지 23년이 되었지만, 처음에 담배를
끊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습니다. 담배가 가지는 중독성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입니다. 술도 그렇습니다.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도 좋지
않고, 다음 날 일을 하는데도 지장을 줍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시간을 빼앗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잔 술의 알뜰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들이 있습니다. ‘기도, 희생, 봉사,
나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의 정거장을
지나치곤합니다. 좀 더 여유가 생기면 나누겠다고 하면서 지금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성당에서 주어지는 희생과 봉사의
시간들과 나의 여가 시간이 겹쳐지면 내 몸과 마음은 희생과
봉사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여가 시간으로 기울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문제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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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시련은 더 큰 그릇이 되라는 주님의 초대장입니다!
 
2018년 나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시련은 더 큰 그릇이 되라는 주님의 초대장입니다!

구약 성경의 여러 책들 가운데, 참으로 재미있는 책이 있는데, 바로
욥기입니다. 욥기는 우리를 무죄한 의인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에
대한 깊은 묵상에로 초대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한 가운데서도 욥이 온 몸으로 겪었던
무죄한 의인들의 고통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악인들은 그 숱한
죄를 짓고 과오를 범하고도, 저리도 건강하게 떵떵거리면서 잘 먹고
잘 사는데, 무죄한 이들, 평생토록 신앙 안에서 올곧게 살아온
사람들이 겪는 끔찍한 고통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게 됩니다.

채 인생을 꽃피우기도 전, 청춘의 나이에 끔찍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자녀, 그를 잃고 슬피 우는 부모, 아직 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어린 아이의 불치병, 평생 주님 마음에 드는 좋은 일만 해온 의인의
요절...가만히 들여다보니 이 세상은 인간의 눈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들로 가득합니다.

평생토록 하느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면서 악을 멀리해온 욥 역시, 어느
날 갑작스런 큰 시련과 마주합니다. 그는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으며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둔 행복한 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주님께서는 그가 소유하고 있던 수많은 가축들과
종들을 불살라버리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금쪽 같은 아들과 딸들도 데려가십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머리 꼭대기부터 발바닥까지 심한 부스럼증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느님이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기 1장 21절)

차라리 주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는 아내의 조롱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기 2장 10절)

욥이 자신에게 닥쳐온 큰 시련 앞에 처음에는 그리도 당당했지만,
점점 증폭되는 고통 앞에 얼마나 괴로웠던지 이런 독백을 남겼습니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욥기 3장 3절)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욥기 3장 11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고통 앞에 욥은 큰 시험에
빠집니다. 하느님의 부재와 현존 체험 사이에서 긴 내적 갈등을
거듭합니다. 위로하러 찾아온 친구들과의 대화 중에, 위로보다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도 느낍니다.

동시에 자신의 지난 인생을 세밀하게 스캔하면서 혹시라도 주님의
뜻을 거슬렀던 요소가 있었는지 성찰합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겪는 우여곡절, 성공과 실패, 병고와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한 한 인간이 그분의 의지, 그분의 처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그 자체가 천부당만부당한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꿈꿉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지속되는 상승 곡선, 이 세상에서의 거듭되는 성공, 고통과 시련 없는
평화로운 인생. 그러나 근본적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
존재들에게 시련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우리
인생 안에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반드시 불행한 순간도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인생의 단계 안에 화사한 꽃봉오리 같은 순간이
있었다면, 반드시 꽃이 떨어지는 낙화(落花)의 순간도 있기
마련입니다.

욥은 자신에게 다가온 참혹한 시련 앞에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되고, 그분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광대무변하신 하느님 앞에 자신은 한낱 티끌같은 피조물에
불과함을 깨닫습니다. 결국 자신의 인생사 모든 것, 성공도 실패도,
재산도 가족들도, 병고도 죽음도 그분 손길 안에 의탁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큰 시련이 다가올 때 우리는 더 자주 하느님을
찾아야겠습니다. 더 자주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추구해야곘습니다.
더 그분께 집중해야겠습니다.

또한 갑작스레 우리에게 다가오는 참혹한 고통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하느님 측의, 징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시련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더 자주 생각하고 더 인격적 관계를
맺으라고 초대하는 초대, 더 성장하고 더 큰 그릇이 되라는 초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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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 6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 62)

주님께로 나아가지 않고서는 따를 수 없습니다.
앞장서서 가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시고
뒤따라 가야할 이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뒤바뀔 수없는 주님과 우리의 자리입니다.
따름의 정신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는 올곧은 정신입니다.

그 어떤 유혹속에서도 주님의 선을 선택하는 오롯한 마음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삶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져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는 먼저 자아를 비워내는 비움의 진리입니다.
뼈저린 혈육의 정까지도 주님께 맡겨드리는 맡겨드림의 진리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그림자까지도
주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따름은 수단이 아닌 삶의 목적이며
따름은 핑계가 아닌 심장의 뜨거운 고백입니다.
이 순간 쟁기를 잡고 이 땅위에서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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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양립할 수 없는 두 욕구

2018년 나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양립할 수 없는 두 욕구>

복음:루카 9,57-62

영화 ‘안시성’에 고구려 신녀가 한 명 등장합니다. - 영화 줄거리가
들어있습니다 – 고구려 수호신인 주몽의 활을 지니고 있으니 보통
신녀는 아니었나봅니다. 환시를 통해 미래를 본다는 이 신녀는
어렴풋하게나마 안시성의 몰락을 보게 됩니다. 그녀가 원하던 것은
자신이 사랑했던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안위입니다. 안시성이 항복만
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당나라 황제의 말에 신녀는 목숨을 걸고
성주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5천 밖에 안 되는 안시성 군사들이 20만이
넘는 당나라 군사들과 맞서 싸우며 지쳐가던 때였습니다. 성주도 이제
당 태종의 마지막 공격 앞에서 처음 가졌던 기개를 잃어갑니다.
그래서 자신을 살리고자 하는 신녀를 반역죄로 칼로 칠 수 없습니다.
그도 사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성주를 시해하기 위해
들어왔지만 결국 성주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한 사물이란 사람이
그녀의 목을 벱니다. 싸움을 멈추게 만드는 욕구를 계속 자아내는 그
신녀를 살려두고는 안시성의 모든 군인들의 패기가 떨어질 것이기에
개인적인 사랑은 접어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그녀의 목을 베고 다시
전의를 불사릅니다. 

우리 안에는 이렇게 양립할 수도 없고 양립해서도 안 되는 두 욕망이
있습니다. 내 욕구와 하느님의 욕구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자기
자신과 화해하라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이것이 욕망과
관련될 때는 큰 문제가 제기됩니다. 심리학은 인간의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하는데 세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과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진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특별히 심리학에서 정의하는 ‘자아’는
각자의 방식대로 설명이 되어 어떤 이들은 자아가 내 자신이라고 하고
그 자아의 욕망에 어느 정도는 맞춰줘야 정신이상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허용되는 정도는 그 욕망을 풀어주고 지나치게
율법적으로 자아의 욕망을 억누르지 말라고 합니다.

일면 맞는 말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맞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아와 참 자신과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아를 참
자신과 동일시하면 우리 입장에서는 하와와 뱀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뱀은 참 나의 육체적 욕구에 불과합니다. 그 육체적
욕구를 너무 억압하면 사람이 미쳐버릴 수 있다고 하여 육체적 욕구와
어느 정도 화해하라는 말은 어느 정도는 죄를 지으며 살라는 말과
같습니다. 매우 위험한 가르침입니다. 만약 안시성 성주가 신녀와
화해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신과 성 주민들은 당나라
군대에게 몰살당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욕구와는 절대 화해해서는
안 됩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순백의 토가를 새빨간 선혈로 물들이며
줄리어스 시저는 그렇게 쓰러졌습니다. 광란의 상태에서 그를 찌른
암살자들은 모두 열네 명. 그들은 모두 한 때 시저와 반대편에 서서
그에게 칼을 겨누었던 인물들이었지만, 내전에서 승리한 시저가
그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해 준 이후 그를 도와 일하게 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저가 베푼 관용은 비수로 돌아와
그의 심장에 꽂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지나간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지만, 암살자들은 그러한
그의 뜻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우리 안의
악이 선으로 돌아오는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그러면
쟁기를 놓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소의 힘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소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뜻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내가 뒤를 돌아보는 것은 나의 뜻입니다. 뜻을
다른 말로 바꾸면 욕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과 내(자아)가 원하는 것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합니다.
문제는 이 두 욕구가 양립할 수 있다고 믿는데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형사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악의’에
‘노노구치 오사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문단에 등단하기까지 줄곧 ‘히다카 구니히코’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 그를 살해함으로써 그의 육신뿐 아니라 작가로서의
성취까지 모두 지워버리려 했습니다. 이에 ‘가가 형사’는 노노구치가
자백했음에도 그가 살인을 한 진짜 동기에 대해 추적하던 끝에, 그의
‘악의’가 바로 살인의 진짜 동기임을 밝혀냅니다. 노노구치는
히다카로부터 어두운 과거를 용서받고 그의 도움으로 작가의 꿈 또한
이룰 수 있었지만 그것을 굴욕과 패배로 받아들이고 그 ‘악의’를
주체하지 못한 끝에 히다카를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출처: ‘친구 혹은 은인, 그 양립할 수 없는 두 이름’, jinks30님의
블로그]

선의와 악의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하나가 강하면 다른 하나는
약해집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소의 힘은 약해집니다.
자아의 욕망에 자꾸 시선을 주다보면 주님이 바라시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자아의 욕구와 화해해서는 안 됩니다. 죽기까지 싸워
이겨야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자아의 욕구는 그 자체로
‘악’이기 때문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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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예수님의 제자직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9,57-62: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떤 사람이 주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57절)하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받아들이시지 않고,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58절)라고 하신다. 그 사람은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이 사도의 영예를 받으려는 것 같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부르셨고 그들에게 영예도 주셨던 것이다.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를 바로 잡아서 하느님
안에 잘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나오는 하늘의
새와 여우는 교활하고 부정한 권능들로 악마의 무리를 의미한다. 우리
마음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을 채 가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사악한 영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우리 안에 여우의 굴과 새들의
보금자리가 있으면 주님께서 어떻게 들어오셔서 쉬실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더니,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59절) 하였다.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60절)고 하셨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세례로 새로이 태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은
이들로 표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61절)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절)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인간적인 일이 아무리 중요하게
생각되어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우리의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더디게 한다면 가차 없이 끊어 버려야 한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끊어버리고 도망쳐 나온
악마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며 반대의 길로 가려하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31-32) 아무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우리가 믿고 따르고 있는 주
그리스도를 등지는 일이 없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어둠을 향해 걷는 것이 아니라,
밝아오는 여명을 향해 걸어야 하기에 과거에 집착해서 현실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몰두하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마땅한 거처도 없으셨던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따르는데 망설임 없이 즉시 따를 수 있는
자세와,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여 집착하지 않고 자꾸 뒤를 돌아봄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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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10월 3일(수) - 하나님의 명령을 기준으로 사는 성도

오늘은 “하나님의 명령을 기준으로 사는 성도”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신명기 11장 8절 말씀에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형태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중에서도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허공을 치듯 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지요.

그냥 막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에 중심을 두고 기준을 두고 그
기준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이
후자 하나님을 중심으로 주님이 가르치신 그 말씀의 푯대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도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지요. 자기의
결의와 계획 그리고 노력과 땀 그 목표를 가지고 꿈을 이루어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의 지식과 자신들의 목표 그 꿈들을 이루는 것이지
그 이상의 것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한사람의 지식과 기준으로 꿈에 매이지 않지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그 뜻을 이루어 가는 무한 광대한 하나님의
그 계획을 성취시켜 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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