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2일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순례하는 교회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7-02-22 07:04:52    조회 : 358회    댓글: 0

☆ 2017년 가해 2월22일 수요일 [(백)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수도회]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순례하는 교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베드 5,1-4
† 복음 마태 16,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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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베드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저승의 세력도 이길 수 없도록 교회를 이끌어 주실 성령을
약속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맡기신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내가 믿고 희망한 하느님께서 내가 죄인이고 나약하지만
언젠가는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 믿어 왔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내
눈앞에 생생하게 그 하느님의 능력과 자비를 보여 주실 분이심을
믿습니다.”
과연 이 고백은 인간적인 약점 투성이였던 베드로가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자신의 확신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은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선한 의지로 산다 해도,
악의 유혹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워 주신 교회는, 인간의 재주와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자비와 은사로
세워진 하느님 백성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는 내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교만과 위선으로
남들에게 잘난 체하는 사람, 수시로 말을 바꾸며 변명만 하는 사람,
가정은 돌보지 않고 교회 봉사만 하는 사람,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교회에서 인맥만 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으려는 사제들과 수도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회심한 베드로는 말합니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라는 시편 저자의 기도가 우리
삶을 이끌 때, 교회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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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주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2017년 가해 2월22일 수요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인 원로>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5,1-4

복음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3-19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일본인 고바야시 타케시는 학생이라
수입이 없어 생활을 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우승상금
5천 달러가 걸린 국수 먹기 대회에 참석을 해서 우승을 한 것입니다.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국제 핫도그 먹기 대회에 참석합니다.
대회의 규칙은 12분 안에 핫도그를 가장 많이 먹는 사람이 우승하는
것으로, 음료수는 어떤 종류든 제한 없이 마실 수 있었습니다. 2001년
전까지 핫도그 먹기 세계 기록은 25개와 1/8개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우승을 차지했는데 몇 개를 먹었을까요? 자그마치 50개를 먹었다고
합니다. 1분에 핫도그 4개 이상을 먹는 기록이었지요.

사실 그는 마른 체구에 대식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할 수 있었을까요?

이 대회의 참석자들은 세계 기록이 25개와 1/8개였기 때문에, 여기서
1개를 더 먹어치우는 26개를 목표로 연습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개수에 한정을 짓지 않고 효율적으로 먹을 수 있는 방법에만 집중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핫도그를 통째로 입에 밀어 넣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에서 벗어나, 빵과 소시지를 따로 먹고 또 빵은 물에 담갔다가 짜서
먹는 방법을 고안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방법으로 그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세계 챔피언을 지냈습니다.

자신을 한계 안에 가두지 않는 성장형 사고방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은 과연 어떤가요? 스스로 할 수
없다면서 한계를 만들고 쉽게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한계를 만들고 포기하는 삶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스스로 주님의 뜻을 잘 따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쁘게
자신의 삶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우리들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들이 될 때,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인 오늘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바라봅니다. 그는 인간적인 약점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런 그가
교회의 반석이 되고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받게 됩니다. 단순히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 질문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정답을 말했기
때문일까요? 베드로의 결점과 부족함을 묵상하다보면 그에게 왜
이렇게 큰 직무를 주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긴
교회 역시 인간의 능력과 재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특별한
은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까? 특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이고 기준이었습니다. 그 생각과 기준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특별한 선택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하늘나라의 열쇠를 얻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한계를 만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따라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쉽게 포기할까요?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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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이 서 있는 것은 막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보여줄 기회를 주기 위해 거기 서 있는 것이다(랜드 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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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그런 것 같다(최원호)

살아보니 그런 것 같다. 좀 바보 같은 친구가 오래 남는다는 것과 그
바보 같은 친구도 쉽게 생각하는 순간 떠난다는 것.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과 돈이 많아지는 만큼, 외로움도 커진다는 것.

사랑은 할수록 모르겠다는 것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을 때는 내
주제를 몰랐을 때 가능했다는 것.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알지만, 그렇게 살기엔 나는 너무 멀리
왔다는 것.

이제 내 행복의 기준은 남의 시선으로 충족된다는 사실과, 그럴수록
진심 어린 사랑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

남들 눈에 멋진 애인, 남들 눈에 멋진 차, 남들 눈에 멋진 생활, 남들
눈에 멋진 직업

진짜 행복은 늘어지게 자고 초췌한 모습으로 일어난 토요일 오후,
이런 모습을 사랑스럽다 말해주며, 내가 어제 먹고 싶다 했던
김치찌개를 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인데.

결국, 우린 벗어나질 못할 것이다. 앞으로도 남의 시선을 위해
살아가게 될 것이고, 남들 시선에 부응하기 위해서 물건들을 사서
입고, 타고, 모을 테지만 언젠가는 알아차리겠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은 단순히 관심이 부족해서, 나를 봐달라는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돌아갈 수나 있을까? 그러기엔 너무 많이 가져버렸나.

값진 물건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 가치를 점점 잃어갑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얻는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과 행복한 시간은 언제나 가치
있고,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행복은 우리가 어떻게 끝을 맺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시작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또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바라느냐의 문제입니다.

살다 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할 지를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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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순례하는 교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2월22일 수요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마태 16,13-19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 16,19)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순례하는 교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6,15) 하고 물으십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16) 하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알려 주셨기에 행복하다.’(16,17) 하십니다.

고기를 잡다가 제자가 된 베드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없었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인식과 실현은 그렇게
우리 편에서 시작되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보잘것없지만 하느님께서 알려주시는 진리를 받아들여
고백하는 것이 신앙인의 행복입니다. 그런 행복은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충만함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지요. 믿는 이들에게는 주님을
알아보고, 알아본 그분을 고백함으로써 구원으로 가는 길이 이미
주어진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며
그를 튼튼한 머릿돌로 삼으십니다(16,18). 베드로는 평범한 어부였고
성격이 급했으며, 물 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에 믿음이 흔들려서 물에
빠지고(14,28-31),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정도로 믿음이 강한
사람도 아니었지요(26,3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6,18) 하십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구절이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며, ‘교회’ 또한 어떤 조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다교 회당과
구별되는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한데 모으려고 하셨지 특정
집단을 형성하여 조직을 만들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이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어떤 조직의 우두머리를 정하신 것으로
알아듣는 건 무리인 셈이지요. 이 구절은 조직과 제도의 관점이 아니라
신앙의 관점에서, 교회가 예수님의 모범을 이어갈 소명이 있음을
알려주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6,19)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권한은 구원을 결정할
권한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보잘것없는 그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자로 불린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우리의 인간적, 신앙적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각자가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주도권에
자신을 맡길 때 공동체와 더불어 행복한 사람이 되겠지요.

또한 교회 공동체를 섬기도록 불린 봉사자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이들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그리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지
말고 열성으로 돌보며,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1베드 5,2-3) 오늘도 나를 깨우쳐주시는 성령께 자신을
내맡기고 주님을 고백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함으로써 참
교회가 되는 행복한 날이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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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주님 없이는
 
2017년 가해 2월22일 수요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주님 없이는

형제들과 남도 지방의 한 깊은 계곡으로 소풍을 갔다가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깎아 지르는 듯한 절경의 계곡 그 사이로는 엄청난 양의
맑은 물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계곡 여기저기에는 집채만한 크기의
바위들이 즐비했습니다. 어떤 바위는 그야말로 ‘반석’(盤石),
‘마당바위’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계곡으로 내려가 신나게 수영을 즐긴 저희는 차가운 물에 체온이
떨어져 으스스해지면 넓은 바위 위로 올라와 햇볕에 몸을 말렸습니다.
바위들이 얼마나 넓던지 열 명 이상 되는 형제들이 드러눕기도 하고
둘러앉아 카드놀이를 해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생각만 해도 마음 든든해지는 넓고 평평한 바위들을 떠올리며 그 옛날
베드로를 향해 반석이란 이름을 지어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장마가 시작되어 큰물이 흘러들어 급류가 형성되면 웬만한 바위들은
견뎌내지 못하고 다들 하류로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덩치 큰 반석들은
수백 수천 년 세월이 흘러도 그 자리를 꿋꿋이 지켜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베드로 사도는 원래 든든한 반석이라기보다는
쉼 없이 흔들리던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큰물이 들이닥치면
속수무책으로 떠밀려 내려가던 작은 돌맹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이랬다 내일 저랬다 변덕도 심했습니다. 오늘 목숨이라도 걸 듯
맹세하지만 내일 어떻게 뒤통수칠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모든 인간적 약점과 불충실을 정확하게
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반석, 즉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시며
수제자 직분을 수여하심을 물론 천국문의 열쇠까지 맡기셨습니다.

그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던 동료 제자들은 속으로 웃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스승께서는 그에게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십니다.
한번 결정하신 바를 번복하지 않으시며 끝까지 밀고 나가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오복음 16장 18~19절)

주님의 간절한 바람대로 어느 순간 베드로 사도는 든든한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럭비공 같은 성격에다 ‘허당’ 기질이 다분했던 그,
결점 투성이요 허점 투성이였던 그가 반석이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수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좌충우돌을 반복하던 베드로, 옛 습관을
쉽게 고치지 못했던 그, 그렇게 어리석고 아둔했던 그, 마침내
스승님을 세 번이라 모른다고 한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 그였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한 가지 깨달음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주님 없이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나로구나! 주님의 도움
없이는 나는 단 한 순간도 스스로 설수 없는 존재로구나! 주님을 떠나
사는 그 순간이 지옥이요 멸망이로구나!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주님 밖에 없구나!’

그 절절한 깨달음과 정화의 과정을 통과한 베드로 사도는 그제야
진정한 수제자, 든든한 반석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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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2월22일 수요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

오늘 축일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셔서 모든 교회에 봉사할
권한을 주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한다. 베드로
사도좌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는
것이다. 지금도 로마에는 성 베드로가 집회 때에 사용했다는 의자가
보존되어 있고 새로이 교황이 선출되면 그 의자에 앉음으로써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권리를 이어받는 표시로 삼고 있다.

복음: 마태 16,13-19: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준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으로 가셨다.
그곳은 갈릴래아 바다 동북쪽 40킬로 떨어진 곳으로 요르단강의
상류이며 이곳 주민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다. 이 한적한 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조용히 대화를 하실 수 있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그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물으신다. 

제자들의 대답은 여러 가지가 나왔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14절) 이렇게 물으신 것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을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의
생각을 먼저 묻지 않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5절)하고 물으신다. 그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고, 기적을 보았으며
주님과 함께 이적을 행한 제자들의 답은 어떻게 되어야 했는가?

베드로는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고 대답하였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부름으로써,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자체이시므로
죽음은 그분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음을 나타낸다. 그 육신은 나약하여
죽었지만, 곧 다시 살아났다. 그 안에 거하시는 말씀을 죽음은 가두어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8절) 이 반석은 베드로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진 신앙이다. 주님께서는 이
반석이라는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가장 먼저 이
신앙을 고백한 사람을 이 이름으로 부르시며, 장차 그의 것이 될
권한에 대해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이며, 우리의 공통적인 이 고백을
베드로가 가장 중요시할 것이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갖는 열쇠는 바로
교회가 갖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원이 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이고 그 상속자이다. 여기에 들지 못한
사람은 거룩한 것들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그리스도는 결코
흔들리지도 닳아 없어지지도 않는 바위이시다. 그래서 베드로는
흔들리지 않는 교회의 확고한 믿음을 나타내는 이 이름을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제 우리의 자세는 어떤가?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나에게 있어 그분은 무엇인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해야 하며, 그 답을 각자의 생활과 믿음에서
각자가 발견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 안에서 우러나오는 답이어야 한다.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는 의미는 바로 당신 자신을 “종들의 종”
이라고 부르면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시는 교황님을 중심으로 온
교회가 더욱 일치하고 그분으로 하여금 더욱 많은 봉사를 잘 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베드로 사도가 당신의
신앙고백으로 이러한 직책을 갖으셨고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셨다면, 이제 우리도 올바른 신앙고백과 함께 삶을 이어가고,
언제나 하나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으뜸, 교황님께서 하느님의
대리자로 교회를 올바르게 인도하도록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자.

- 수원 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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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2017년 가해 2월22일 수요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 16,13-19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꾸중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긴다고 하셨고,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실 정도로
호되게 야단을 치셨고, 닭이 울기 전에 나를 3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베드로 사도의 배반을 예언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물고기를 많이 잡아 주신 예수님을 두려워했었고, 죄인인
자신을 떠나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함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모습은 베드로 사도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에 교회는 거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위로를 받고, 희망을 얻고, 용기를 얻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인류와 역사 앞에 잘못도 하였습니다. 그릇된 신념으로 이교도를
단죄하였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서서 이성의 빛을 가리기도 했습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로로 2세 교황께서는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겸허하게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저 역시도 베드로 사도와 비슷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교우들 앞에서는 사제로 산다고 이야기하지만 많은 경우에 저의
욕심이 앞설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위한 시간을 내기 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저를 용서해주시고, 사제로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기에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의 자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생전에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자리를 내세운 적이 없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고, 동생 안드레아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을 만난
뒤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교회는 사도들의
으뜸이라고 생각하였고, 기꺼이 베드로에게 교회의 사도좌의 권위를
내어 주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죽기까지 예수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3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고백을 합니다. 베드로 사도를
계승하는 교황은 또한 예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지금 이곳에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나누는 이곳이 이미 천국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신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조건으로 용서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권위는 주장하고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권위는 유리와 같아서
쉽게 깨지고,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아낌없이 내어주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권위는 불의와 폭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으며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기 마련입니다. 나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나의 권위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권위가
아닙니다. 나의 체면과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권위일 뿐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참된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 나눔과 희생으로 사라지지 않는
우리들의 자리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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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으뜸 중의 으뜸|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2월22일 수요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마태16,13,-19)

으뜸중의 으뜸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여 지상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더냐?”
(마태16,13)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어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16,15)하고 물으셨습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또 받아들이는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나의 소신과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마태16,16)
라고 한 신앙고백이 베드로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오늘 나의 고백으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받은 사람’이라는 말이 구세주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587년 바빌론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하여 약 50년간 바빌론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유배가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갑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민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을 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과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은 여러 예언자처럼 역사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으뜸중의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만큼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소명에 귀 기울이고 복음적인 삶에 결코 소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텔레비전 시청 시간을 10분만 줄여 성경을 봉독한다면 하루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반 신문이나 잡지를 보는 시간 5분을 교회 서적을
읽는 시간에 할애 하거나 묵주기도 1단을 한다면 기도의 맛을 느끼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육신을 위하는 시간에 못지않게 영적인 몫을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오늘을 변화와 쇄신의 날로 삼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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