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가해 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7-01-01 06:27:41    조회 : 367회    댓글: 0

☆ 2017년 가해 1월1일 주일 [(백)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수도회]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고 공유하는 평화의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민수 6,22-27
○ 제2독서 갈라 4,4-7
† 복음 루카 2,16-21

2017년 새해 첫날입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인 오늘,
새해에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참으로 평화롭기를 염원하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시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신 하느님의 자녀답게, 가정과
사회와 세계의 평화를 이룩하기로 다짐하며 이 미사에 참여합시다.

***** ***** *****

◈ 오늘의 묵상
 
목자들은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경축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목동들의 이야기와 축하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변화를
마음속에 새기셨습니다. 새해 첫날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니와 함께
머물면서 우리 안에 시작되는 새로운 시간과 변화를 느끼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진정한 행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물고자 하시며 우리에게 커다란 사랑과 희망을 주고
계심을 알고 깨닫는 것입니다. 성모님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행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종’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 사랑과 희망을 우리 마음 안에 잘 간직하여야
하겠습니다.
행복의 다른 이름은 평화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행복을 빕니다.”
하고 말하는 것과 “평화를 빕니다.” 하고 기원하는 것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과 평화는 하느님에게서 오지만 고난과
시련의 과정을 견디어야 합니다. 성모님의 삶은 행복과 평화가 충만한
삶이었지만 아드님의 가시밭길을 함께 가신 삶이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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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평화와 기쁨의 마리아

2017년 가해 1월1일 주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제1독서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6,22-27

제2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4,4-7

복음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6-21

2017년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늘 함께 하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오늘 제1독서에서 해주십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

주님과 함께 하는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올 2017년이
되셨으면 합니다.

우울증을 앓고 계신 형제님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자신의 우울증 원인을 어머니에게서 찾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부당하게 대우를 받았고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요. 즉, 다른 형제와 달리 자기만 외할머니 집에 살았는데,
그때 받은 상처는 나이 50이 넘은 지금에도 잊히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로 어머니 때문입니까? 다른 이유는 없을까요?”라고
질문을 던졌지요. 그러나 이 형제님께서는 “그렇다니까요.”라고
대답하면서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제가 이런 질문을 던졌던
이유는 형제님과 거의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극복해서 잘 지내는 분들을 더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조건 어머니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행동했던 어머니를 둔 다른
분들 역시 우울증을 앓으면서 힘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영향을
끼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커다란 착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느님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종종
만납니다. 자신이 이렇게 큰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데 가만히
계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자신이 처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느님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말로 하느님
때문일까요?

자신보다 더 큰 아픔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주님과 함께 하는 분들을
수없이 만납니다. 자신에게 응답 없는 주님께 원망보다는 또 다른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시는 분들이 역시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때문은 아닐까요?

성모님에 대해 오늘 복음은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라고 전해줍니다. 성모님께서
받으신 고통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불평불만을 던지기보다는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길 뿐이었지요. 그러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았고,
어떻게 이 뜻을 따를 수 있는지를 관찰하고 묵상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이런 태도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관찰하고, 그 활동의 의미를 발견해 내고, 또
그와 같은 모양으로 활동해야 합니다. 이러한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신 주님 안에서 참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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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희망 없이 있을 수 없고, 희망은 두려움 없이 있을 수
없다(바뤼흐 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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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치를 인정하기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음식이 있습니다. 특히 외국에 나가면
‘이런 것을 어떻게 먹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남미에 갔다가
봤던 ‘꾸이’라는 음식은 ‘기니피그’라는 쥐과의 동물입니다. 중국에
갔다가 본 ‘비둘기’ 구이나 곤충 요리 역시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음식이었습니다.

내가 싫다고 해서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제게만
징그럽고 혐오스러울 뿐 그 지역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좋아하면서
즐겨 먹는 음식입니다.

이렇게 싫은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별다른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싫은 사람이 곧 나쁜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면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지 다를
뿐이지, 내가 가치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내 가치 자체에 집중한다면 어떨까요?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나의 가치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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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고 공유하는 평화의 삶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1월1일 주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루카 2,16-27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민수 6,24)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고 공유하는 평화의 삶

새로운 한해의 문을 열며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사랑과 평화를
주시고 축복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새해에는 주님의 평화가 온
세상에 스며들어 하느님 보시기에 좋고 조금은 더 의롭고 살만한 삶의
지평이 열리길 희망합니다. 우리 함께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자신과
이 사회를 비추는 등불이 되어주시길 기도해야겠습니다.

새해 첫날 우리는 제1독서에서 그 유명한 ‘아론의 축복’을 듣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주님의 축복이란 한마디로 우리가 행복의 근원이요 선 자체이신
주님과 함께하며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축복의 결과는
악으로부터의 보호, 죄의 용서인 자비, 평화 셋입니다. 그분과
함께하며 그분 안에 머물기만 한다면 우리 이 모든 것을 거저 받게
되는 것이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새해 첫날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물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로
다짐하면서 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마음을
모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을 다른 이들과 함께 공유하고
나누어야겠지요. 축복은 전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사제도
사실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주는 중개자일 뿐이지요.

우리 행복의 근원이신 주님의 축복을 빌어준다는 것은 평화이신
주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해주시기를 빌어주는 것을 뜻합니다. 평화란
하느님이 계시는 상태로서 모두가 원하는 것이지요.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인데 이는 ‘모자람이 없이 완전하다’는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를 주러(요한 14,27)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축복’(사도 3,26 참조) 자체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찼을 때’ 세상에 오시어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시어 인간의 법에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어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갈라 4,4-6). 우리는 그분의 오심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어 감히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이지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새해에도 여전히 시련과 고통, 갖가지
어려움을 겪고 우리 사회도 기대한 만큼 변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는 ‘성사적 축복’ 속에서
고통을 이겨나갈 힘을 받게 되고 서서히 행복을 향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험한 세상 한 가운데서도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신 가난한
하느님을 알아본 목자들의 맑은 영의 눈으로 내 삶의 역사와 이
세상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축복을 공유하려면, 성모님처럼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루카 2,19) ‘거룩한 수동의
자세’와, 주님을 찾아내 찬미를 드린 목자들처럼(2,16-18) 적극적으로
평화를 실천하고 나누는 ‘거룩한 능동의 몸짓’이 필요하겠지요.

평화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는 평화의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과 세상을
축복하는 첫 걸음을 시작하는 복된 새해 첫날이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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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마리아 스타일
 
2017년 가해 1월1일 주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 2,16-21

마리아 스타일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힘겨웠던 지난
한해였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정말이지 납득하지 못할 기상천외한
현실 앞에서 얼마나 마음고생들이 많으셨습니까?

부디 새해에는 대단하다든지 특별한 해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한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평범하다는 것,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참 좋은 것
같습니다. 크게 성공하거나 크게 기뻐하지 않지만 크게 실망하거나
크게 좌절하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하루하루 너무 비참해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그럭저럭 하루를 넘기고 일상 안의 작은 것에서
소소한 기쁨을 찾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모릅니다.

특히 새해에는 ‘특권층’ ‘고위층’ ‘금수저’ ‘갑질’ ‘특별대우’
‘청탁’ 같은 단어들로 인해 더 이상 상처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소위 ‘특권층’, ‘고위층’ ‘금수저’라고
불리는 분들의 대오각성이 필요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오랜 세월 정경유착, 뇌물 제공, 대가성 훈방 등에서
자유롭지 못한 분들, 서민들의 땀과 눈물로 천문학적 재물을 하늘높이
쌓아올린 분들 크게 가슴을 치며 지금 고통 받고 있는 국민들을 위해
활짝 곳간을 여시기 바랍니다.

직무상 저도 ‘특별대우’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 일반인들과 따로
떨어진 곳에 이른바 ‘내빈석’에 앉아 행사에 참여하거나 식사를 할
때가 있는데, 세상에 그렇게 어색하고 불편할 수가 없습니다. 밥맛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딜 가든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사전에 차단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도 주최 측에서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으면 제가 단골로
쓰는 멘트가 있습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만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아신다면 저 쫓겨납니다.”

이런 면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특별대우 거부 운동의 최
일선에 서 계십니다. 얼마 전 교황님께서 신발을 사러 로마 시내 한
신발가게에 가신 적이 있었습니다. 교황님의 경호를 맡은 분들은 엄청
당혹스러워했겠지만, 그리고 신발가게에서 교황님을 만난 사람들은
경이로운 시선을 보냈겠지만, 교황님께서는 ‘내가 신을 신발 내가
사는 게 뭐 대단한 거냐?’며 아무 거리낌이 없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교황님께서는 어딜 가시든 특별대우를 그렇게 싫어하십니다. 해외
순방 시 묵으실 숙소로 엄청 넓고 으리으리한 침실로 안내하면 정색을
하시며 거절하십니다.

저는 이런 교황님이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제나 수도자들은 너무나 편안하다.
교황님께서는 우리에게 봉헌생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당신께서 몸소 잘 보여주고 계신다. 사제생활 잘 하고 싶은가?
수도자로 모범적인 삶을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저 교황님
일거수일투족만 바라보고 그대로 따라하면 되니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이런 면에서 교황님의 스타일은 ‘성모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 역시 특권의식이 조금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세상 사람들
시각으로 볼 때 성모님은 엄청난 분이셨습니다. 메시아 하느님을
자신의 태중에 잉태하신 분이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분입니다.
우리가 만일 성모님이었다면 엄청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 앞에 엄청 자랑도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특별대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언제나 겸손하셨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만
추구하셨습니다. 손톱만큼도 특별대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만일
제가 성모님이었다면 만삭의 몸이었기에 호적등록 작업에 대한 연기
신청서를 제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한평생 음지에서 묵묵히 예수님을
뒷바라지하며 외양상으로는 한 평범한 유다여인으로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올 한해는 그간 우리 모두를 괴롭혀왔던 특권의식, 특별대우,
예외적용, 이런 것들을 추방하는데 함께 힘을 모아야겠습니다. 재산
좀 있다고, 잠시 높은 자리에 앉아있다고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소리 없이 꾸준히 자기 길을 걸어가는 서민들,
평범한 사람들이 대우받고 존경받는 사회 건설을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특권의식이 없는 사람을 우리의 지도자로
아야겠습니다. 서민들이 흘리는 눈물과 그들이 하루하루 겪는 애환에
깊이 공감하는 마음 따뜻한 사람을 우리의 인도자로 뽑아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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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2017년 가해 1월1일 주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 2,16-21

오늘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입니다. 오늘 교회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고 있고, 평화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복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께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은총에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성모님께서 복되신 이유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도 이렇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을 찬미하기 때문에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큰일을 하셨기 때문에 모든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겸손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고, 미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가난한 이들을 따뜻하게 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에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히 계속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을 받으라고 하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재물의 축복, 건강, 승진, 소원성취, 자녀의 축복, 명예,
권력과 같은 것들일 것입니다. 새해에 그러한 축복을 바라는 것도
의미 있고, 그런 축복을 빌어 주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복’은 또 다른 의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고 해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복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부족해도, 아파 신음을 할 때라도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복되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것처럼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아기 예수님을 처음 받아 준 손은 목수 요셉의 거친
손이었고, 그분을 처음 맞아들인 장소는 누추한 구유였습니다. 그분께
찬미와 찬양을 드린 첫 번째 사람도 밤을 지새우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강생의 짧은 이야기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곳, 비천한 사람들 안에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핵심 진리가 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나를 구원할 내 ‘인생의 구유’입니다.   

건강한 아이를 입양하기도 힘든데, 장애아를 입양해서 사랑으로
키우시는 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장애인인 아들을 위해서
함께 뛰는 분이 있습니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는 생각으로
‘꽃동네’를 일구어낸 분이 있습니다. 버려진 이들, 병든 이들, 장애인들
속에서 작은 예수를 보았고, 그들을 위해서 평생을 살아가는 분도
있습니다. 화려한 꽃이 되기보다는 썩어 양분이 되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총과
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거창한 행사나 사업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처럼
겸손과 순명으로 삶의 모든 파도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귀양살이
끝날 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하소서.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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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유의 어머니

2017년 가해 1월1일 주일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복음: 루카 2,16-21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구약의 예수님이라고 하면 단연 파라오로부터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난 모세입니다.
그런데 그 모세의 탄생은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헤로데의 질투로 죽임을 당할 뻔 했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때는 헤로데의 눈을 피해 달아난 곳이 이집트였지만 모세는
이집트 안에서의 어떤 누군가의 도움만이 절실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중 어떤 누구도 어디 다른 곳으로 달아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이집트 공주가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멸망과도 같은 피해를 줄 누군가가 태어났는데 이집트의 공주가 그를
구해준 것입니다. 이스라엘 남자 아기는 모두 나일강에 던져 죽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 명령을 지키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을
운명처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집트 왕의 명령을 어길 수
있었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까지도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하고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명령에 역행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세상과 싸워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 또한 이집트 공주처럼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힘에 짓눌려 세상을 이기시고 그
종살이에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실 메시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습니다. 누가 원수의 자식을 낳아줄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성모님만이 이미 그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신 유일한 분이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리스도를 세상에
낳아줄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누가 원수인지 명확히 아시고
계셨습니다. 

‘위플래쉬’란 위대한 드러머의 꿈꾸는 한 청년과 또 한 명의 미치광이
지휘자에 관한 내용의 영화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세상에서 가장 쓸
데 없는 말이 ‘그만하면 잘했어’야”라고 말하며 손에서 피가 터져
나오는데도 다그치기만 하는 폭군 선생이 천재 드러머를 탄생시키는
내용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선생은 그냥 폭군입니다.
그 선생보다 더 미친 학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선생 또한 그 학생의
공연을 지휘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선생은 본래 자기만 아는
사람이고 마치 파라오처럼 변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학생은 유명한 드러머가 꼭 되어야한다는 꿈을 안고 미국의 유명한
음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플렛처란 유명한
지휘자의 눈에 들게 됩니다. 그런데 플렛처가 지휘하는 밴드는
그야말로 무한경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드러머도 세 명씩이나
되어 미친 듯이 노력하지 않으면 악보나 넘겨주어야하는 보조로 바로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주인공 앤드류는 여자 친구까지 버려야
하는 처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미쳐야만 잔류가 가능한 그 밴드를
위해 사랑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피치 못할 사고가 생겨 공연에
늦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앤드류를 이해하지 않고 그를
잘라버립니다. 애인과 심지어는 가족, 친구들까지 포기하고 그 선생의
말만 따라 손이 터져라 드럼을 두드렸는데 결과는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동안의 노예생활 고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망해버린 앤드류는 그 선생의 폭력적 가르침에 의해 자살을 한 한
학생의 조사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그 선생의 모든 강압을 토로합니다.
그렇게 플렛처는 학교에서 잘리고 맙니다.

시간이 흘러 앤드류가 우연히 들린 재즈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던 플렛처를 만나게 되고 플렛처는 한계 이상으로 학생들을
끌어올리려던 것뿐이라며 미안하다고 앤드류를 위로합니다. 그리고
앤드류가 다 외우는 위플래쉬란 곡으로 자신이 이끄는 밴드로 경연에
참가해보자고 제의합니다. 앤드류는 다시 음악을 할 수 있어 기뻤지만
공연 시작 바로 전에 표정이 바뀐 플렛처는 “네가 나한테 한 거 다 알고
있어”라고 하며 연주곡을 위플래쉬가 아닌 앤드류가 모르는 곡으로
시작합니다. 미래 연주자를 찾으려 몰려든 전문가들 앞에서 그의
연주가 형편없게 만들어 그가 영원히 음악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앤드류는 아직도 자신이 플렛처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에
한탄하며 무대를 내려옵니다. 그러나 다시 올라가 혼자 미친 듯이
드럼을 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위플레쉬. 어차피
망쳐버린 인생 더 잃을 것도 없습니다. 이에 함께 있던 단원들도 그의
드럼에 맞춰 위플래쉬를 연주합니다. 관객이 지켜보고 모든 밴드
단원이 엄청난 몰입도로 연주하는 위플래쉬를 끊었다가는 자신의
커리어가 위험해지는 상황. 플렛처는 결국 드럼에 맞춰 지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누구도 들어볼 수 없었던 위대한 연주가 완성된다는
내용입니다.  

앤드류는 플렛처라는 선생에게 먼저 인정을 받고자했습니다. 그러나
그 선생은 아이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완전한 밴드를 만들어 명성을
유지하는 것뿐, 그들에 대한 참 사랑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
너희들을 위한 거야”라고 하며 다그칩니다. 그의 노예가 되어있는
많은 이들 중에 나중에 완전히 미쳐버린 앤드류만이 대들 수
있었습니다.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플렛처를 따르는 게 아니라
플렛처가 자신을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자유로운 영혼을 통해서
진정한 한계를 뛰어넘는 음악을 사람들이 듣게 된 것입니다. 그의
체제 안에서는 그저 세상에서 잘 한다는 정도였지만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니 무아지경의 음악이 솟구치게 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아의 압제로부터 고생하며
죄의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오직 성모님만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돌에 맞아죽던 간음한 여자라 불리던 아무 상관 안
하는 분이셨습니다. 가장 약해보였지만 가장 강한 분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원죄는 그분의 발밑에
잠잠히 밟혀 있었습니다. 그분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처지가 못
됩니다. 왜냐하면 뱀이란 세상 교만이나 명예, 쾌락이나 편안함,
돈이나 영화 등을 원하는 이들을 유혹하여 노예로 삼을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을 전혀 바라지 않는 성모님과 같은 분에게는 그저 지렁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이유는 이처럼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바로 세상에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때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무언가 잃을 것이 있으면 그것에 얽매여
하느님의 아드님을 받아들을 자유를 잃게 됩니다.

저와 함께 일하고 계신 관리장님이 하느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한 15년 전 기적과 같은 일이 있었는데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 분은 농사를 짓고 계셨고 논에 불을
질러 태우신 다음 다 꺼진 것을 확인하고 아내와 함께 집으로 내려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뒤를 돌아보더니 산이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분명 자신의 밭에서 옮아 붙은 것이 확실했습니다.
관리장님은 위로 뛰어올라가서 옷에 불이 옮아 붙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불을 껐고 아내는 소방서에 전화하러 뛰어 내려갔습니다.
불은 바람을 타고 나무에서 나무로 옮아 붙었기 때문에 그 훨훨 타고
있는 화마와 혼자의 힘으로 싸우는 것은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다
포기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람이 산 밑으로
불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눈을 들어 동네 사람들이 뛰어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들이 이상하게 불이 다 꺼졌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바람은 정말 위에서 아래로 불고
있었고 그렇게 훨훨 타던 불이 순식간에 꺼져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듯 자신을 버리고 오로지 주님께 맡겨야만 하는 처지까지 사람을
끌어내리십니다. 그래야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잃을
것이 너무 많아서 주님께 온전히 매달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해보려고 하기 때문에 노예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가 없다면
예수님을 세상에서 구해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세상의 원수를 드러나게 할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불이 나서 온 산이 아주 멀리까지 다 타버린 때가 있었는데
그때 며칠 동안 자신의 돈으로 밥을 사 먹으면서까지 불을 끄러
다녔다고 합니다. 그때의 고마운 생각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니었다면
그때 타 버렸을 그 산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아니었으면
태어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을 좋아하게 만드는 자아에
사로잡혀 종살이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성모님처럼 자유롭게
당신께 ‘아멘’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사람을 통해 당신의
말씀을 세상에 전해주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감사한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세상에 좋은 것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목숨을 잃어도 감사하는 분이셨기 때문에 세상에 구원을 낳으실 수
있으셨고 하느님의 어머니까지 되실 수 있으셨습니다. 성모님을
닮으려면 잃어가면서도 감사할 수 있는 연습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수원 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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