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30일 안타까운 주님의 사랑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9-30 06:29:18    조회 : 406회    댓글: 0
photo58.jpg - -
  • ☆ 2016년 다해 9월30일 금요일 [(백)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수도회] 안타까운 마음으로 질책하시는 주님의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욥 38,1.12-21; 40,3-5 † 복음 루카 10,13-16
142.gif
  • ◈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는 폭풍 속에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빛이 머무르는 곳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 또 어둠의 자리는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인생의 풍파를 겪는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 불행의 끝은 어디이며 어두운 동굴 속에서 벗어나는 빛은 언제 비추어질 것인가?” 하고 궁리합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만년에 베들레헴에서 35년 동안 머무르면서 성경을 연구하였습니다. 박학다식한 성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성경을 연구하면서 기도와 고행, 은수 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진리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성경을 모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성인은 사무치게 깨달았습니다. 성인은 성경의 원문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교정에 교정을 거듭하여 그리스도의 진리를 대중에게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성인의 번역은 ‘불가타’(대중 라틴 말 성경)라고 불리면서 오늘날 교회에서 전례 성경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성인의 희생과 헌신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찬양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스며들게 하는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커다란 질책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어둠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이며 신앙의 정수가 담겨 있는 거룩한 책입니다. 성경 묵상을 통해 삶의 어두움에서 벗어나고, 구원의 빛에 도달하여 참된 안식을 얻읍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crown_of_thorns_2.jpg
  • ◈ [인천] 모든 사람이 나 같지는 않습니다. 2016년 다해 9월30일 금요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제1독서 <아침에게 명령해 보고,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았느냐?> ○ 욥기의 말씀입니다. 38,1.12-21; 40,3-5 복음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3-16 모든 사람이 나 같지가 않습니다. 즉,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나와 다른 말과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면서 도저히 이 세상을 같이 살 수 없다면서 멀리할까요? 그런데 그렇게 피하게 되면 또 다시 나와 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전의 사람보다 더 심한 사람을 만나서 더 큰 고생을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나와 다른 사람 천지니까요. 종종 본당사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너무나 이상하다면서 어쩌면 이럴 수 있냐고 흥분하십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다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미사도 엉터리라면서 참석하기 싫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어떤 본당에 신부님께서 강론이 너무 긴 것 때문에 신자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계속해서 건의를 했고 심지어 교구청에 투서까지 보냈다고 합니다. 강론을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해서 강론이 너무 길고 지루하다는 것이었지요. 다음 정기 인사이동 때 새로운 신부님께서 부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은 강론이 5분을 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좋아했지요. 하지만 얼마 뒤에는 신부님이 강론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론이 짧다며 불만이 가득합니다. 사제서품을 받았으면 엉터리 미사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미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제의 강론 역시 헛소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사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미사를 집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과 맞지 않다면서 엉터리라고 단정 짓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이 틀렸고, 주님이 엉터리라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을 듣는 사람은 곧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말 역시 듣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서품을 받은 사제의 미사와 강론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어떨까요? 사제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종종 봅니다. 사제의 외적인 모습을 보고서 그런 판단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또 다른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line02.jpg
  • 이해하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돕고, 도우면 모두가 산다 (로렌스 베인즈).
20160930_01.jpg 성 예로니모 성인입니다.
line02.jpg
  • 낙서 소동(‘좋은 생각’ 중에서) 2005년 다보스 세계 경제 포럼 회의에서 생긴 일이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앉았던 자리에서 낙서 한 장이 발견되었다. 동그라미, 삼각형, 사각형 등 도형에 부채탕감, 말라리아, G(지)8 같은 단어가 어지럽게 적혔다. 영국 조간신문 ‘데일리 미러’ 기자는 이 종이를 심리학자에게 가져갔다. 그는 “삼각형을 겹쳐 그린 것은 블레어 총리가 집중하려고 노력했지만 마음이 딴 데 가 있었다는 증거다. D(디)를 P(피)처럼 늘여 쓴 것은 반대파의 비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다. 공격적 성향이 드러난다.”라고 분석했다. 영국 언론은 총리가 토론 중에 딴생각을 했다며 연일 기사를 냈다. 이에 질세라 ‘인디펜던트’는 특별 연구 팀을 고용했다. 그런 뒤 “동그라미 끝이 완벽히 맞물리지 않은 것을 보아 그는 신앙심이 얕고 타고난 지도자가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며칠 후, 낙서는 블레어 총리 옆에 앉았던 빌 게이츠 것임이 밝혀졌다. 블레어 총리 대변인은 “총리의 글씨가 맞는지 아무도 우리에게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집중을 못한다거나 지도자감이 아니라는 분석 결과를 빌 게이츠에겐 어떻게 적용할지 즐겁게 지켜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빌 게이츠의 필적이 맞다고 확인했으나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성공한 기업인이자 컴퓨터 천재를 난타한 영국 언론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함부로 남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모습으로 비판받게 되기 때문이지요.
20160930_02.jpg 성 예로니모 성인의 성화.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line02.jpg
  • ◈ [수도회] 안타까운 마음으로 질책하시는 주님의 사랑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9월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 루카 10,13-16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루카 10,16) 안타까운 마음으로 질책하시는 주님의 사랑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욥에게 우주만물의 세계와 인간의 이치, 삶과 죽음에 대한 모든 것을 아는지 묻습니다(욥기 38,12-21). 그러자 욥은 보잘것없는 자신이 대답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40,4). 욥은 하느님 앞에서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겸손한 자세로 고백한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여줌에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과 벳사이다를 향하여 불행하다고 선언하시며 질책하십니다(루카 10,13). 회개하지 않는 카파르나움 주민들에게도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라 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10,15).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의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과 자비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질책하신 것은 멸망을 바라셔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하셔서 안타까운 나머지 강한 ‘사랑의 경고’를 하신 것이지요. 겸손하게 회개하여 자비의 나라로 돌아오라는 사랑의 초대인 셈입니다. 서방교회의 4대 교부 가운데 한 분인 예로니모 성인은 탁월한 성서학자요 수덕가이며 영성상담가요 방대한 저술을 남긴 저술가이도 합니다. 그는 늘 악과 불의와 거짓을 단호히 거부하고 선과 정의와 진리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강하고 솔직했습니다. 빨리 화를 내는 성격이었지만 곧바로 후회할 줄 알았고, 다른 사람의 결점보다 자신의 결점에 더욱더 엄격함으로써 겸손하게 주님 앞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찾기도 전에 다가와 사랑으로 함께 하시고, 좋은 것을 끊임없이 주고 계시지요. 나의 생명, 건강, 재능, 시간, 가족과 공동체, 신앙, 하느님의 말씀, 아름다운 자연,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 자비의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많은 순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감사하지 않은 채 무심코 지나쳐버리곤 합니다. 문제는 무딘 마음, 중심성과 방향감각의 상실, 그리고 보이는 세계와 물질에 길들여지는 익숙함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의식과 양심,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면 주님의 사랑을 알아채지 못하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삶의 중심과 방향이 사랑이신 주님이 아닌 나 자신과 세상이 되어버릴 때, 무엇을 하든 내 인생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게 되고 방향을 상실한 채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버릴 것입니다. 물질세계와 감각세계에 익숙해져가면 갈수록 보이지 않는 주님의 손길을 알아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가을의 모퉁이, 주님께서 기다리시는 벤치에 앉아 지금껏 알게 모르게 주신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돌과 같은 굳은 마음을 내려놓고 영의 감각, 깨어 있는 의식을 불러일으켰으면 합니다. 주인인양 착각하며 방향을 잃고 헤매던 나를 바라보며, 가을 잎새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 교향곡을 연주해보아야겠습니다. 일상의 익숙함에 젖어 본성을 따라가는 발걸음을 멈추어 창조의 새로움에 자신을 던져보아야겠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당신 사랑의 손길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나만의 길을 걷는 나를 향하여 안타까운 사랑의 질책을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주님을 끌어안았으면 합니다. 그것은 힘들고 고통스런 순간을 맞곤 하는 나를 사랑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요, 주어지는 모든 것과 만나는 모든 사람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임은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선과 사랑과 기쁨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기억하고, 마음을 열고 주어지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주님께 되돌아가는 기쁜 회개의 날이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line02.jpg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9월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루카 10,16) 누군가 내 말을 들어 주지 않거나 무시하고 물리치게 되면 기분이 참 나쁩니다. 내 말을 말 같지 않게 여긴다는 것은 그 말이 아니라 내 인격을 무시한다고 느끼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남의 말을 진지하게 잘 들어줄 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존중하고 그 사람의 인격과 영혼을 사랑하는 첫째가는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은 너희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내 말도 뒤담아 듣게 되고 내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도 귀담아 듣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거꾸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 훈련을 많이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편입니까? 내 말만 하기를 좋아하지는 않나요? 내 말을 다른 사람이 귀담아 들어주기를 바란다면 먼저 내가 남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하겠지요. 오늘 특별히 다른 사람의 말을 더 귀담아 들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도 더 깊이 깨우치는 기쁨을 누리시길 빕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line02.jpg
  • ◈ [서울]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2016년 다해 9월30일 금요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루카 10,13-16 대전 가톨릭 대학교에서 강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기차표를 예매했지만, 철도 노조의 파업으로 예매한 기차가 운행을 정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지인의 도움으로 고속버스를 예매하였습니다. 명동에서 고속터미널로 가는 길에 지하철을 한참 기다렸습니다. 전역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었고, 문제가 해결되는 동안 20분 정도 기다렸습니다. 다행히 버스 출발 전에 도착해서 대전 가톨릭 대학교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철도, 금용, 의료’ 분야에서 파업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성과 연봉제’가 도입될 것이라고 합니다. 성과를 내는 사람은 더 많은 연봉을 받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연봉이 삭감될 수도 있는 제도인 것 같습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제도 일 것입니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이고 이윤을 많이 창출하는 직원에게 더 많은 급여를 주고, 이윤을 내지 못하는 직원은 급여를 적게 주거나, 해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원하지 않는 제도입니다. 성과에 대한 압박을 받기 때문입니다. 성과를 내기 위해서 편법과 불법을 행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에 급급하면 먼 미래를 향한 투자나, 연구가 퇴보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에 해고를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에는 ‘두개의 깃발’이라는 묵상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탐욕, 욕망, 이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명예, 권력, 재물이라는 바벨탑을 높이 쌓으려는 사람들입니다. 더 많이 갖기 위해서 양심을 팔아버리고, 친구를 속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화려한 것 같지만 위험한 깃발입니다. 모래 위에 세운 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익을 위해서는 전쟁과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깃발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이 가득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을 택하기도 하고, 아픈 것도 받아들이고, 죽음까지도 감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생명들과 공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도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썩어 없어질 재물을 쌓으려 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뉴턴의 물리학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모든 것은 질서가 있고, 법칙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 위에 현대의 산업, 자본, 문화가 꽃을 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뉴턴의 물리학으로 규정지울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관찰자의 생각에 따라서 관찰대상이 변한다는 것이 양자역학입니다. 뉴턴의 물리학으로는 풀 수 없는 현상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이윤과 성과’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섬김과 나눔’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자비와 사랑’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생각하면서 9월의 마지막 날을 지내고 싶습니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line02.jpg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비만을 청할 수밖에 없는 존재 2016년 다해 9월30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 아침에게 명령해 보고,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았느냐? > 독서: 욥기 38,1.12-21;40,3-5 워싱턴 주 클라이드 힐 마을에서는 동전 던지기를 통해 시장을 선출한 적이 있습니다. 선거 결과 두 후보의 표가 모두 576표씩 똑같이 나오자 선거관리 위원회는 동전을 던져 결정을 내리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유권자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항의를 해왔습니다. 그때 선거관리 위원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방법이라고 나무라지 마십시오. 한 사람, 단 한사람만 더 투표에 참가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것은 전부의 책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동전던지기를 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누구도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려주기 위해 욥이 등장한 것입니다. 욥은 하느님 앞에 그보다 더 온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의인입니다. 그렇지만 그도 자녀와 재물, 자신의 건강과 명예까지 모두 잃게 되니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또 자신에게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일어나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물론 하느님을 원망하는 말은 하지 않지만, 나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도대체 왜” 라고 하느님께 따지듯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욥에게 따지듯이 물으십니다.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느냐고, 바다의 심연을 살펴본 적이 있느냐고, 빛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느냐고,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대화상대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고. 오늘 독서는 우리가 주님 앞에서 ‘왜’라는 질문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욥도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전에 시골에 살 때 개를 목욕시키려고 하는데 목욕을 거부하며 몸을 털어서 온 비눗물이 몸에 튄 적이 있었습니다. 개들은 사람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매번 무언가를 해야 할 때 왜 그래야 하는지 알려주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개와 사람의 관계보다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가 더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를 만들 수 없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만큼 능력의 차이도 크고 생각의 차이도 큽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이 나에게 왜 이러시느냐고 따질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강길웅 신부님이 평화방송에서 한 강연내용을 옮겨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어떤 방송 인터뷰를 하셨어요. 평화방송인가? 그때 마지막으로 기자가 물었어요.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없습니까?" 그러니까 김수환 추기경님이 당신은 ”하느님의 자비 밖에 청할 것이 없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아, 그때 좀 제가 대답이 싱겁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민주화를 위해서, 또 우리 교회를 위해서 많은 공헌을 하셨는데 왜 대답이 그것 밖에 없을까? 그런데 제가 어느 날 소나무를 옮겨 심으면서 그분 말씀의 뜻을 깨달았어요. 피정 집에 있을 때 소나무 세 그루를 이렇게 옮겨 심는데, 큰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제 포그레인이 산에서 떠 가지고 오는데 전선을 피하기 위해서 들고는 못 오고, 그냥 길로 다 던져 버렸어요. 그러니까 흙이 다 떨어졌죠. 그 소나무 흙 붙여도 살리기 어려운데 세 나무가 다 흙이 떨어져 나갔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 버리라고 그래요. 안 산다고 이래요. 그런데 저는 포크레인 값도 있잖아요. 억울하죠. 산 임자한테 허락을 받고 얻었는데, 그래 나도 모르게 “하느님, 저 소나무 좀 살려주세요!” 하는데 하느님이 아 그때 그러시는 거예요. “니가 잘 한 것이 있으면 한 가지만 대 봐라. 내가 그걸 보고 살려주겠다. 얼른 말해!” 이러시는 데, ... 없어요. 정말. 얼른 말하라고 하는데 내가 잘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 밖에 청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추기경님이 하신 것을 내가 알고 이해하게 됐는데, 소나무는 3년이 넘은 지금까지 잘 살고 있어요. 성전에서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드릴 말도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의인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뒤에 숨어서 머리도 못 들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한 세리가 의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영성이 깊어지면 주님 앞에서 할 말이 줄어듭니다. 내가 한 모든 일들이 주님은 먼지로도 그것보다 훨씬 훌륭하게 해 내실 수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저 내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느님의 크심을 깨달아 그분의 자비만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문을 되뇌는 기도가 교회의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생명까지도 오늘 가져가신다고 해도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그분의 자비만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line02.jpg
  • ◈ [청주] 말씀을 사는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9월30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성예로니모 사제기념일 (루가10,13-16) 말씀을 사는 사람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 북동 해안에 삼각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도시로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기적들이 특히 두드러진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보다 큰 은총을 받고도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큰 은혜로움을 체험한 만큼 확실한 회개의 삶을 살아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루가10,13). 불행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징벌이 아니라 자업자득입니다. 주님께서 화를 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스스로 거절하여 화를 입는 것입니다.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불 뱀이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일 때 모세가 주 하느님의 명을 받아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았고 뱀에게 물렸어도 그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습니다(민수21,8-9). ‘구리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죽지 않으리라’ 고 했지만 쳐다보지 않아서 죽었다면 그것은 다른 누가 그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죽음에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목이 말라 죽겠다고 하는 사람이 물을 마시면 살 것을 물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결국 불행을 당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행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죄를 범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죄를 뉘우쳐 회개했느냐가 문제입니다. 바룩서 1,15-22의 말씀대로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그분을 거역하였으며, 우리에게 내리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걸으라는 주 우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하고 고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면 삽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자비를 거부하면 결국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코라진, 벳사이다, 가파르나움의 도시는 결국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도시에 대한 경고는 동안에 많은 은총을 받고도 거듭나지 못한 우리에 대한 꾸짖음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옆의 두 죄인 중 하나는 십자가 위에서 서둘러 회개 하였습니다. 그래서 확실한 구원을 얻었습니다(루가23,43). 따라서 우리도 ‘희망을 가지고 서둘러 회개 한다면 반드시 구원의 은총을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요한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요한3,17-19). 그러므로 불행을 당한다고 투덜대지 말고 먼저 말씀을 사는 사람, 회개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복이 되지만,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불행이 됩니다.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벌로 누가 불행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을 거절한 것 자체가 불행입니다. 목이 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누가 샘이 있는 곳을 알려준다면 그것은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듣고 샘을 찾아간다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이 때 죽은 사람은 누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불행에 떨어뜨린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행동하는 삶으로 복을 누려야 합니다. 복을 누려야 하는 것은 믿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가톨릭 성가 284번 무궁무진세에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