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0일 영원한 삶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신앙의 역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9-20 06:49:15    조회 : 357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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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9월 20일 화요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수도회] 영원한 삶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신앙의 역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지혜 3,1-9 ○ 제2독서 로마 8,31ㄴ-39 † 복음 루카 9,23-26 오늘은 모든 교우가 함께 모여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리며 순교 정신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목숨까지 바친 우리 신앙 선조들을 번제물처럼 받아들이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성인들을 본받아 우리도 제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바쳐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시기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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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는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느님과 재물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입으로 하느님을 선택한다고 말하겠지만, 마음속에서는 많은 유혹과 핑계가 생겨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경축하는 103위 순교 성인들은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징표로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신 분들입니다. 그중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만 25세의 나이로 사목 생활의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자신의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셨습니다. 성인은 죽기 전에 이렇게 설파하셨습니다. “내가 외국 사람들과 통한 것은 오직 천주님을 위해서입니다. 나는 지금 그 천주님을 위해 죽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인 성 정하상 바오로는 한국 천주교회의 재건을 위해 투신한 평신도입니다. 성인은 북경 왕래를 아홉 차례, 의주 변문까지는 열한 차례를 왕복하며 유방제 신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였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은 임금보다 더 큰 임금을 선택하여 충성을 바치고, 부모보다 더 큰 부모를 섬겨 효도를 다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대군 대부’이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여 영원한 생명의 표지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죽음도 그들을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이 보여 준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지닙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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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생명까지 바치는 순교 2016년 9월 20일 화요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3,1-9 제2독서 <죽음도, 삶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1ㄴ-39 복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3-26 오늘은 드디어 갑곶순교성지에서 순교자 현양 대회가 있는 날입니다. 이 순교자 현양 대회를 준비하면서 참 많이 힘들더군요. 더군다나 모든 행사 준비를 누구의 도움 없이 갑곶성지에서 독자적으로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쉽게 생각하려고 해도 걱정이 많아지더군요. 특히 행사를 하루 앞둔 어제는 이제 어느 정도는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저녁에는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힘들다고 해서 그냥 포기하면 될까요? 마치 어렸을 때 오래달리기를 하다가 힘이 들어서 뛰던 것을 걷게 되고, 더 시간이 지나서는 아예 천천히 걷던 모습처럼 그래서 포기하려고 했던 모습처럼 힘들어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순교자 현양 대회를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우선 그렇게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순교자 현양대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봐서라도 행사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모든 행사가 끝난 뒤에 얻게 되는 기쁨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역시 안 됩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그런데도 이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것은 분명히 신나게 내려올 내리막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뒤에 있을 기쁨이 있기 때문에 포기는 절대로 안 될 말이라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리스도인이란 뒤에 있을 기쁨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한 순간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의 기쁨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생명까지도 주님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과거 우리 순교자들이 만약 한 순간의 기쁨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는 순교를 선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순교의 순간은 너무나 힘들겠지만,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순교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해 봅니다. 지금 한 순간의 기쁨만을 바라보기에 내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피하고 포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지금 편하고 쉬운 자리, 지금 영광을 얻는 자리를 추구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어떠한 순간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 뒤에 있을 기쁨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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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통을 겪고 나면 인생과 친구와 자신을 재발견하는 행복이 다가오는 법이다.(해럴드 블룸필드)
20160920_01.jpg 갑곶성지에 있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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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닥짐. 바닥짐(Ballas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며 항해할 수 있도록 배의 바닥에 싣는 돌이나 모래, 물 등을 말합니다. 그래서 거친 파도와 비바람을 만나서 이리저리 배가 흔들릴 때, 이 바닥짐이 배의 중심을 잡아주어서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바닥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좌초되지 않고 앞으로 쭉쭉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바닥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바닥짐의 재료들을 보십시오. 엄청난 무게로 배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바닥짐이 항해를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적인 도구가 됩니다. 우리 삶 안에서의 고통과 시련이 바로 바닥짐이 아니었을까요? 이 바닥짐을 포기하고 버리려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0160920_02.jpg 바닥짐이 있어야 배가 좌초되지 않습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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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영원한 삶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신앙의 역설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9월20일 화요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지혜 3,1-9; 로마 8,31-39; 루카 9,23-26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24) 영원한 삶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신앙의 역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한국 순교 성인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말씀의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온갖 박해와 시련을 견디어내고 죽음까지도 받아들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순교 성인들을 사로잡았던 신앙의 뿌리를 알려줍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입니다.”(지혜 3,1). 그들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깊이 의탁하기에 그분의 보호 아래 모든 고통을 넘어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3,2-3). 의인들의 죽음은 사람들의 눈에 벌 받는 것처럼 보이나 그들 안에는 불사의 희망이 타오릅니다(3,4). 의인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더 많은 고난을 겪을 수 있으나, 그것은 받게 될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3,5). 주님께서는 더 훌륭한 신앙인이 되고 순수하고 완전한 평화와 행복으로 이끄시려고 그들을 단련하시기 때문입니다(3,6). 고난을 겪는 의인들은 하느님의 개입으로(3,7) 고통과 죽음에서 벗어나 광명과 영광의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악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징벌에 동참하게 되어 모든 민족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의인들처럼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을 알기에 사랑 안에서 사랑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고 죽음마저 달갑게 받아들였습니다. 사랑 때문에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삶이 삶이 아니라는 신앙의 역설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들은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아무도 우리를 대적하지 못하며,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되는 것을 막지 못함을 믿었습니다(로마 8,31). 하느님께서 만인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외아드님까지 내어주시면서까지 당신 자녀들을 위하시니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것입니다(8,33-34). 그들은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셨기에 어떤 일로도 그 사랑에서 떨어질 수 없음을 믿었습니다(8,35).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외아드님까지 내어주신 하느님의 사랑,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분의 도움에 힘입어 모든 고난과 시련, 그리고 죽음까지도 기꺼이 이겨내셨던 것입니다(8,37). 우리도 순교자들처럼 나 자신을 더 이상 내 생각과 판단과 삶의 중심으로 삼지 않고 하느님만이 나를 인도하실 수 있음을 인정하며, 박해를 받아 목숨까지 내놓을 준비를 갖추고, 나날이 겪는 고난과 시련, 불편함과 어려움, 곤궁, 아픔 등을 겪어내며 예수님을 따라야겠습니다(루카 9,23-24). 사랑 때문에 사랑으로 예수님을 추종하는 일상이 바로 순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상의 순교를 사는 신앙인답게 오직 하느님과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재물, 명예, 권력, 사람 등 온갖 종류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멈춤으로써 참 생명을 구해야겠습니다(9,25). 또한 신앙에 무관심하거나 낯설어하며 적대적인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담대히 신앙을 고백해야겠지요(9,26). 오늘도 순교성인을 기리며 일상 안에서 기꺼이 순교할 수 있는 사랑을 깊이 호흡하고, 공동선을 위해 자신을 내놓고 버리고 비우며, 어떤 상황에서든 사랑으로 인내하고 정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죽어야 사는 역설을 살아내는 것이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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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9월20일 화요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 그저께 제주 성당에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사건으로 사망한 자매님이 우리 재속 프란치스코회원이라는 소식에 또한번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오는 10월 2일에 종신서약을 앞두고 열심히 준비중에 아침미사를 봉헌하고 11시에 혼배미사가 있어 축하해 주기 위해 집에 가지 않고 성당에 홀로 남아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던 중이었다네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던 중에 그 죽음에 동참하게 된 것이 어찌보면 우리가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심오한 뜻이 담겨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더욱 숙연해 집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순교성인대축일을 지냅니다. 그분들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박해와 수난을 당하고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 우리 한국교회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듯이 불의의 습격으로 죽임을 당한 루치아 자매님도 우리 신앙의 또다른 밑거름이 되기를 소망하며 천상영복을 기원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든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심을 확고히 믿기만 한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느님이 내 편이시다!" 외쳐 보시길 빕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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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사랑의 순교자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9월20일 화요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사랑의 순교자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한국의 순교자들을 기억합니다. 우리교회는 백 여년 동안 신유, 기해, 병오, 병인등 4대 박해를 통해 만 명 이상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 순교자의 피가 오늘의 신앙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병인박해 1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시간 순교의 삶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순교라는 말은 신앙과 믿음을 증거하기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합니다. 순교자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었습니다.”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그 믿음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지혜서의 말씀을 보면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서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3,9).라고 적고 있는데 바로 순교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들의 행동이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은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지혜3,1-9).라고 적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삶을 세상은 어리석게 보았지만 주 하느님 눈에 들었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영광의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고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곧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순이 누갈다는 옥중수기에서 “앉거나 눕거나 구하는 바는 오직 치명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순교성인 중 가장 나이 어렸던 유대철 성인은 1814년 기해박해 당시에 스스로 포도청에 찾아가 천주교 신자라고 밝혔고 옥리들이 담뱃대를 불에 달구어 쇠끝으로 그의 살을 지졌지만 태연자약하게 이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옥리들이 화젓가락으로 벌건 숯불을 집어 올려 그의 입에 갖다 대는데 유대철이 입을 크게 벌리자 깜짝 놀라 숯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최해성 요한은 배교하면 한 고을을 통째로 주겠다는 회유를 거절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박해를 각오해야 했고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외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고 오직 주님만을 얻고자 했으며’주님과 고난을 함께하고 그분과 함께 죽기를 원했습니다. 아무것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이나 칼도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었습니다(로마8,35-39). 그들이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126장에서는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 식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하고 노래합니다. 지금 받는 수고와 땀은 후에 받을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시련과 역경,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100여년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 신자수가 늘어갔고 감옥에 갇히고 처형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 힘은 바로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면서도 평화롭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이제 그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처음 신앙을 받아들일 때에 성직자나 수도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선교사도 없었습니다. 성경도, 기도서나 묵주, 신심서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공부하며 진리를 찾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은 무엇이든 풍족합니다. 그런데 주님 체험은 많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은총은 많은데 담을 그릇이 없는 탓입니다. 복음에서 보듯“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지만 버리지 못하고 십자가를 짊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그만한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 버린다는 것은 비운다는 것입니다. 비운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덜어내야 함을 말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나의 취향과 성격, 나의 계획 등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삶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말고, 더 크신 예수님에게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그 대표적인 모델로 바오로 사도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베냐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 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5-8)라고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철저하게 버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려고 할 때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자기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 입니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위한 삶에 익숙해져 왔는데 그런 것을 버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희생과 아픔이 없이는 절대로 자신을 버릴 수 없습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지 못하면 자기 십자가를 질 수도 없습니다. 바오로는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했으며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 11,23.27). 하고 고백합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는 것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것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구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희생제물로 바치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풍요로워질수록 신앙생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타협할 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다하는 것인데,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 데 하면서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과 그리고 명예와 재물과 취미생활, 위신체면에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에게 자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지혜3,9). 현대의 순교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자기를 비우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수고와 희생의 땀을 흘리는 것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 알퐁소는 “당신이 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춘다는 것은 결국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에게 명한 가장 큰 계명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순교자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밉거들랑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날은 안 올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지를 죽이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이십시오. 이것이 오늘의 순교입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 마더 데레사 -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거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당신이 성실하면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적을 만날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을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 모른다. 그래도 만들어라.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주면 공격할지 모른다. 그래도 도와주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로 차일 것이다. 그래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라.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가톨릭 성가 287번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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