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일 큰 사람의 모습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8-02 06:27:18    조회 : 995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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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년 다해 8월2일 화요일 [(녹)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수도회] 하느님을 향한 시선 집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예레 30,1-2.12-15.18-22 † 복음 마태 14,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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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탄 배는 밤새 풍랑에 시달립니다. 측은한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시자, 오히려 제자들은 유령을 보는 것만 같아 겁에 질리지 않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삶에 지친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성격이 급한 베드로가 나서지요. 자기도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엉뚱한 청을 드립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밤새 풍랑에 시달리던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갑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물에 빠지지 않습니까? 거센 바람을 보고는 그만 두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도, 그는 두려움에 빠지고 만 것이지요. 베드로는 심한 바람과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만 바라볼 때는 풍랑을 이기고,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보던 시선을 거센 바람 쪽으로 돌리자, 그만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주님과 함께라면 기적적인 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점 역시 깨달아야 하지요. 우리가 때때로 믿음이 약해지는 것은 다른 것들에 한눈을 팔다, 그만 주님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한눈을 팔고 있는지, 습관적인 행동은 무엇인지, 이 점에 대해 성찰했으면 합니다. - 매일 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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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천] 큰 사람의 모습 2016년 다해 8월2일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제1독서 "네 허물이 커서 내가 이런 벌을 너에게 내린 것이다. 내가 야곱의 천막을 되돌려 주리라."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30,1-2.12-15.18-22 복음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2-36 언젠가 후배 신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예전에 제가 상처를 주었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워낙 저를 잘 따르는 후배였기 때문에 제가 상처 주는 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어떤 말을 내가 해서 상처를 받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학생 때의 일을 말하더군요. 학교일에 대한 처리 문제로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아마도 일을 더 잘 해보자고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상처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러면서 단순한 학교생활에서의 실수에 대한 지적을 한 것인데 왜 그 당시에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에게 큰 상처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여기에서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지적을 받았으면 고치면 되고, 입장차이로 인한 사소한 마찰과 갈등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상처로 받아들이면 과연 상처가 아닌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삶 전체가 문제 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어렵고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냥 가볍게 넘기면 안 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 주님께서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응답이 도대체 없다고 하지요. 지금 내가 이렇게 아프고 힘든데 주님께서는 그냥 침묵만 하시는 것 같다고 하십니다. 과연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그냥 우리를 방치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요? 지금 당장 필요한 주님의 손길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왜 그러신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 시간에 제자들은 배에서 거센 파도에 밤새 시달리고 있었지요. 어부 출신의 제자들이 많았음에도 어떻게 하지 못했던 것을 볼 때 인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하기 힘든 상황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구하러 서둘러 오지 않으십니다. 이는 두려움을 통해 그들을 훈련시킴으로써 견뎌 내는 자세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분은 온화하게, 점진적으로 제자들을 자극하며 더 나은 자세로 대처하도록 가르치십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아픔과 두려움에 가만히 계셨던 것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바로 우리를 훈련시키고 성장시키는 중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도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았다고 소리치는 모습보다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큰 사람의 모습을 갖추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교육법을 익히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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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을 두 손안에 꽉 잡고 있을 때는 그 행복이 항상 작아 보이지만, 그것을 풀어준 후에는 비로소 그 행복이 얼마나 크고 귀중했는지 알 수 있다(막심 고리끼).
20160802_01.jpg 물 속에 빠진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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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능력과 간절함 어떤 책(정철, ‘한 글자’)에서 본 글입니다. 목표가 190Cm 높이에 있고 키가 160Cm라면 목표에 닿을 수 없는가? 있다. 우리에겐 팔이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놓친 것, 그냥 지나친 것, 포기한 것들의 대부분은 팔을 뻗지 않아 인연을 맺지 못한 것들이다. 키가 능력이라면 팔은 간절함이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이 아닐까요? 특히 마지막의 ‘키가 능력이라면 팔은 간절함이다.’라는 말에서 오랫동안 머물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능력만을 탓하고 있을 때가 많았지요. 능력이 부족하다고 또 능력이 주어지지 않은 내 자신을 보면서 남 탓은 왜 이렇게 많이 하는지요? 그런데 간절함을 통해서도 충분히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할까요? 팔이라는 간절함으로 160Cm의 키라는 능력으로도 충분히 190Cm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0160802_02.jpg 바다처럼 넓은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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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하느님을 향한 시선 집중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8월1일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마태 14,22-36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The walking on the water 하느님을 향한 시선 집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위를 걸으심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어두운 새벽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14,26).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유령인 줄로 압니다(루카 24,37). 제자들은 저녁이 될 때까지 홀로 산에서 기도하고 계신 예수님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떨어진 상태에서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자’(마태 14,24) 거기에 눈길을 빼앗겨 예수님을 잊고 있었습니다. 시선이 하느님의 집인 자신의 내부가 아닌 밖으로 쏠려 마음이 갈라지자 두려움이 찾아듭니다. 이는 불교에서 순수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 대상에 대한 분별심이 생겨나면서 자아가 생겨나고, 자아의식은 소유의식과 자기중심적인 생각, 나아가서는 집착이 생겨나 일체의 고통이 생겨난다고 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순수한 본성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느님께만 시선을 집중하고 그 안에 머물면 될 것을 헛되고 헛된 현세 사물에 마음을 빼앗기니 두려움과 불안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14,27) 하십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있는 자 바로 그분’, 곧 존재 자체요 영원한 의미 자체이신 그분께 시선을 두고 그분께서 내 인생에 함께해주심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순수한 본성 회복의 길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14,28) 하고 청합니다.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그는 물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습니다(14,29).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지요. 그러나 그만 거센 바람이 일자 그만 두려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14,30). 베드로가 물 위를 잘 걷다가 빠져버린 것은 시선을 예수님이 아닌 거센 바람에 돌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상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것입니다. 순수한 믿음, 참된 믿음은 하느님을 향한 시선의 집중에서 시작됩니다. 거센 바람에 눈길을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은 세속의 유치한 원리나 육의 정신에 파묻혀 버렸음을 뜻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나환우와의 만남을 통해 역겨웠던 그것이 단맛으로 변하는 체험을 한 뒤 죽기까지 시선을 하느님께만 고정하였습니다. 그가 태어난 아씨시는 성인 당대에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고, 도시 간의 쟁탈전과 사라센인들을 비롯한 외적들의 위협이 불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따라서 평지나 벌판에 있던 많은 수도원들은 안전한 성안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런데 성 프란치스코는 거꾸로 안전한 성을 떠나 아무런 보호벽이 없는 평지로 내려왔습니다. 그는 오직 하느님께 눈과 마음을 고정하고 사랑에 불타 세상의 어려움과 불안정에 자신을 노출하며 복음을 말과 행동으로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낮에는 농부들의 일을 거들어주고 나환우들을 돌보고 밤에는 수바시오산 기슭에 있는 작은 동굴이나 움막에 머물며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우리의 순수본성을 회복시켜주시는 주님께 시선을 고정할 때 두려움과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동안 나는 어디에 마음을 두며 살아가는지, 나의 눈길을 마음을 빼앗는 것들은 무엇이며, 나는 왜 하느님께 집중하지 못하는지 깊이 새기며 시선을 한곳으로 모으는 거룩한 집중의 날이 되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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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8월2일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용서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여러분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오늘은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가 요람으로 삼았던 아주 작은 경당 포르치운쿨라의 천사들의 성마리아 전대사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사부로 모시는 이들에게 이 날은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나의 죄를 모두 용서받는 은혜로운 자비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특별히 이 전대사 축일이 제정된지 8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고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자비의 특별희년이어서 더욱 은혜롭습니다. 전대사를 얻기 위한 조건을 말할 때 지정된 성당 순례와 사도신경을 바치고 고백성사와 영성체를 하고 교황님의 지향대로 기도를 바치는 것을 주로 이야기합니다. 교회법적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에 따르면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용서하는 것이 유일한 조건입니다. 내가 용서를 받고 죄사함을 얻고자 하면서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겠지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도 오늘 똑같이 말씀하시네요. "용서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여러분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누구를 용서하시겠습니까? 그가 누구든 그 사람은 여러분의 은인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모든 죄와 허물을 씻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귀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용서함으로써 용서받는 축복과 은혜를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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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연중 제18 주간 월요일 2016년 다해 8월2일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 마태 14,22-36 2012년 11월 17일입니다. 저는 발목이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주위에 있던 동료들의 도움으로 병원엘 갈 수 있었습니다. 척수 마취를 하면 하반신은 마취가 되지만 의식은 깨어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골절된 다리를 수술하였고, 골절된 곳이 고정되도록 심을 박으셨습니다. 만일 제가 수술을 받지 않았다면 저는 평생 제대로 걷지 못했을 것입니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수술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을 하였습니다. 잘못된 습관들을 고치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살을 가르고, 뼈에 심을 고정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마취를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습관을 고치고, 하느님께로 나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결단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음은 마취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나의 의지와 주님께 대한 믿음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은 많이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서커스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장 가슴을 졸이게 하는 공연은 높은 곳에서 그네를 타는 것입니다. 양쪽에서 그네를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공중으로 뛰어 올라 회전을 하고, 다른 쪽의 그네를 향해서 몸을 던집니다. 다른 쪽 그네를 탄 사람이 자신의 손을 잡아 줄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공연입니다. 공중에서 묘기를 보이는 사람도 아름답지만, 긴장 속에서 자신을 향해서 손을 내미는 동료의 손목을 잡아야 하는 사람도 아름답습니다. 어떤 분이 약국에 가서 이렇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약국은 몇 시에 닫습니까?’ 그러자 주인이 이렇게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약국은 ‘10시까지 열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지만 생각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닫는 시간을 염두에 두고 말을 합니다. 또 한 사람은 문을 여는 시간을 염두에 두고 말을 합니다. 약국의 문을 열고 닫는 문제야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지만 사람의 경우에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어떤 부모님은 자녀를 대할 때 늘 희망과 가능성을 이야기 합니다. 넘어졌을 때는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줍니다. 성적이 떨어졌을 때도 성적은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 해 줍니다. 비가 내리면 하루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비가 오는 날 할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 합니다. 이런 부모님과 함께 사는 아이는 늘 자신감이 있고, 인생은 희망이 넘실대는 푸른 바다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어떤 부모님은 자녀를 대할 때 늘 불평과 근심을 이야기 합니다. 아이가 넘어졌을 때 체질적으로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합니다. 아이의 성적이 떨어졌을 때도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 것이라고 불평을 합니다. 비가 내리면 날씨조차 도와주지 않는다고 포기합니다. 이런 부모님과 함께 사는 아이는 늘 두려움이 가득하고, 인생은 근심의 파도가 몰아치는 어둠의 바다처럼 느껴 질 것입니다. 사실 희망이라는 것도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마음이 희망을 잡고 있으면 희망은 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희망은 용기를 주고, 희망을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자신감을 줍니다. 그런 친구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걱정이 없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것도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마음이 두려움을 잡고 있으면 두려움이 이제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절망을 주고, 다시 일어설 수 없게 합니다. 두려움도 희망도 실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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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신앙 눈이 좀 어두운 탓 2016년 다해 8월2일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신앙 눈이 좀 어두운 탓 술 드시고 밤늦게 집에 들어가는 데 자식이 도둑이야 외치면 어떨까요. 이 때 아빠라며 애들을 달래주어 ‘아빠구나.’하도록 안심시켜 주잖아요. 그래도 자식들이 ‘뭐가 아빠야 안속아!’한다면 늘 속으며 산 탓이겠죠? 세상 삶은 풍랑으로 가정이 뒤 흔들리고 인생 전복도 있게 마련이지요. 바로 그 역경 앞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와 계십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라 소리치는 건 신앙 눈이 좀 어두운 탓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 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 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오 14,26~27)”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임마누엘 예수님은 우릴 떠나지 않으셔요. 떠나는 건 우리입니다. 떠나고 도망가 봤자 하느님의 손바닥일 뿐인데도.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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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8월2일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 마태 14,22-36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좋은 일도 어려운 일도 감당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려운 일 자체에 매달려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잃고 맙니다. 그리고 곤경에 빠져 자기 눈이 멀면 문제의 핵심을 놓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어려울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려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깨어있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곁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고 두려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곧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의 청을 들어 주셔서 베드로를 물위를 걸어 예수님께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가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져 물에 빠져들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물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았을 때에는 물에 빠졌습니다. 일상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라도 그 안에서 정신을 차려 예수님을 바라보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의탁하면 능력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눈이 멀면, 자기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원자를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시련을 만나서 어려움만 생각하면 해결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센 바람이 부는 고통의 바다가 아니라 그 한복판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문제는 곧 은총입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시련과 고통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을 단련시키는 은총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감추어진 고통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부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믿으면 발등을 찍히지만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보장받습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주님은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믿음으로 손을 댄 병든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기도 "우리의 기도가 언제나 우리 믿음의 뿌리가 되고, 우리의 기도가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나오도록 주님께 기도합니다. 믿음의 은총, 그것은 믿음의 선물입니다. 믿음을 책에서 배우지 않게 해 주십시오. 믿음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그것을 청하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 믿음을 주십시오!'. "저는 믿습니다. 주님!" 하고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 그분의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주님께 제가 청합니다. 제 작은 믿음을 도와 주십시오'. 믿음으로 청하는 기도는 치유를 얻습니다. 주님께 청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은총을. 그리고 주님께 청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믿음을 넘어 우리에게 주실 그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청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승리입니다. 우리의 믿음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10_1.gif ♬ Ralf Eugen Bartenbach - Loving Cell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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