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4일 내 멍에는 편하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6-07-14 05:59:32    조회 : 345회    댓글: 0

◈ [인천] 온유함과 겸손함

2016년 7월14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제1독서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6,7-9.12.16-19

복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8-30

예전에 자전거를 타다가 어떤 분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전거를 탈 때 웬만하면 자그마한 배낭이라도 등에 짊어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넘어질 때 배낭이 안전벨트처럼 몸을 보호해 주기
때문이랍니다. 하긴 등산 갈 때에도 배낭이 몸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 배낭 덕분에 위험한 상황에서도 별
문제가 없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크게 공감이 갔습니다.

그런데 이 배낭을 짊어지면 어떨까요? 편할까요? 불편할까요? 배낭 없이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 불편한 것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솔직히 배낭이 없어야 빠르고 편안하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빠르게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을
잘 맞춰서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갑니다. 그런데 평균 시속 120Km로 우리나라의
해안도로를 이용해서 부산을 갑니다. 한편 다른 차는 평균 시속 100Km로
경부선을 이용해서 부산을 갑니다. 과연 어떤 차가 빠르게 도착할까요?
120Km의 차가 더 빠르지만, 100Km의 차가 먼저 도착할 것이 분명합니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빠르고 편한 것이
아니라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내 삶의 목표를 향해서 어떻게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있어 보이는 많은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놀라운 것들을 배울 수 있으면 정말로 좋을 것 같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죽은 이를 살리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법, 배고픈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빵의 기적을 행하는 법 등…….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도대체 가르쳐 주실 생각은 하지 않으시고 그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이 세상 안에서
무슨 쓸데가 있다고 배우라는 것일까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통해서만 하느님 나라에 똑바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낭을 짊어지는 약간의 불편함을 통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것처럼, 온유함과 겸손함을 통해서는 세상사는 불편함을 얻을
수 있지만 안전하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영광을 얻을 수가 있게
됩니다.

주님의 멍에는 적당히 무거워서 그것을 멘 이들에게 오히려 힘을 북돋아
줍니다. 멍에라고도 할 수 있는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워서 반드시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

어떻게 말할까, 하고 괴로울 땐 진실을 말하라(마크트웨인).

*****

성실과 열정

한 소년이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어머니와
할머니, 형 그리고 두 명의 외삼촌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가정환경으로 극심한 영양실조와 폐결핵을 앓고 있었고 정상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언제나 ‘성실’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훗날 소년은 불행한 상황들에 굴하지 않고 문학을 향한 열정으로
‘가난’과 ‘질병’을 극복했고 삶의 아픈 상처들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많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44세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 사람의 이름은 프랑스 최고의 작가
'알베르 카뮈'입니다.

내 자신에게 불어 닥치는 불행한 상황들을 이겨내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어려운 상황에 굴복하지 말고 이겨낸다면 어떨까요?
분명히 큰일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어려운 상황에 굴복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이를 이겨내는 사람인가요? 성실과 열정만 있다면 충분히 이겨서 큰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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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과 사랑으로 지는 짐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7월14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마태 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과 사랑으로 지는 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슬픔과 기쁨과 멀리 동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성을 취하여 우리
곁에 계시면서 인생길에 동행해주시고 우리의 삶을 사랑으로
보살펴주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이 점을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생고와 나날의 긴장으로 지친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위안과 휴식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나가버리는 헛된
세상의 것이 영원한 생명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지요. 오직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온갖 수난을 겪으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11,28)

여기서 말하는 짐은 율법학자들마저 멍에로 여겼던 613가지나 되는
율법의 규정들을 말하며, 나아가 삶 자체에서 오는 고통과 시련 그리고
영혼의 짐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11,30)고 하십니다. 어떤 짐이기에 가볍다고 하시는 걸까요?

율법과 예수님의 멍에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짐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뜻합니다. 곧 그분의 짐은사랑입니다. 사랑이신 분이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고, 내 삶의 짐을 함께 져 주십니다.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본질은 사랑을 위해 사랑으로 멍에를 지고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인생의 어떤 고통과 시련도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사 다 고통 속에 살아가지만 그런 가운데서 기쁘게 사는
비결은 사랑을 지니는 것뿐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멍에를 진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받아들여
실행하는 것이고, 그분의 마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11,29) 사람이 되어 자신의 짐을 받아들이고 지게 될 때 영혼의
짐에도 불구하고 그분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핍박받으며 신앙을 지켜나가기 힘든 처지에서도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고 살아갔던 구약의 ‘아나윔’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우리 또한 병고와 갖가지 고통, 영혼의 짐을 지고 지혜 자체이신 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고통이나 상처를 함께 져주시는 십자가상의
예수님께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봉헌해야 합니다. 그렇게 오직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던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일상의
고통과 영혼의 짐을 지려는 가난한 마음이 나를 참 행복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오늘도 자신의 에고(ego)가 만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난한 자 되어 각자의 멍에를 사랑으로 지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위로를 주시고 나의 휴식처가
되어주시며, 내 고통의 한복판에서 함께 울어주시고 내 십자가를 기꺼이
져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힘차게 살아가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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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7월14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길을 걸어가기에 우리에게는 안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멍에와 짐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구체적인 삶과 접촉하게 됩니다.

멍에와 짐을 통해 우리는 삶을 배우게됩니다.
멍에와 짐이 있기에 삶의 질서와 삶의 성숙이 있는 것입니다.
멍에와 짐이 우리의 소명을 깨닫게합니다.

예수님의 멍에와 예수님의 짐으로
성숙된 관계를 우리는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이 가장 기본적인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멍에와 짐처럼 모순된 것들이 우리를 걸어가게하는 힘이 될 때가 많습니다.
멍에와 짐은 사랑과 분리될 수 없는 또다른 사랑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관계의 멍에와 사랑의 짐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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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2016년 7월14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 마태 11,28-30

매년 7월에는 각 교구의 ‘성소국장’ 회의를 합니다. 매년 회의를 먼저하고,
나눔을 하였습니다. 올해는 사정이 있어서 나눔을 먼저하고 회의를
하였습니다. 회의를 먼저 하는 것도 좋았지만, 나눔을 하고 회의를 하니
더욱 좋았습니다. 나눔을 통해서 격의 없이,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았기
때문입니다. 회의에서는 말하기 어려운 주제도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컴퓨터가 아니기 때문에 입력한 것이 그대로 출력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감성과 감정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열리면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고, 상대방을 이해하면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눔을 통해서 몇 가지 주제를 진지하게 논의 하였습니다.

첫째는 신학교 통합입니다. 예전에는 교구에 신학교를 건립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사제성소도 많았고, 교구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예전처럼 성소가 많은 것도 아니고,
적은 인원으로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도 어려워졌기 때문에 예전처럼
관구 단위로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들이었습니다.
학부는 각 교구에서 공부를 하더라도, 대학원 과정은 모든 교구의
신학생들이 함께 모여서 공부를 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라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둘째는 신학교 입학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지성, 영성, 건강’의 균형 잡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반대학처럼
지적인 능력으로만 신학교에 입학을 시키는 것은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교구장 추천과 같은 전형으로 사제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은
‘수시’로 선발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라는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지적인
능력이 조금 부족해도 10년 동안 신학교에서 양성하면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과 수도권에 있는 교구와 지방과 농촌에
있는 교구의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셋째는 원로사목자(은퇴사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고령화되는
사회에서 원로사목자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었습니다. 80년과 90년도에 많은 사제들이 탄생했습니다. 이제
그분들이 곧 원로사목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로사목자에 대한
지침, 피정, 교육, 숙소, 사목현장 등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지난 한 주일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교육’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섬김, 나눔, 봉사를 강조하셨습니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견디는 제자들은
큰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을 위해서는
가족들과 친지들과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긴박하게 흐르는 악보에도 ‘쉼표’가 있듯이, 오늘 예수님께서는 잠시
휴식시간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마치 유격훈련 중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 것 같습니다.   

성소국장들의 모임도 그렇습니다. 회의 시간은 진지하고, 열띤 토론이
이어지지만, 나눔 시간에는 격의 없이 대화를 하게 됩니다. 약간의 주류와
안주는 덤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학교에서의 수업도 쉬는 시간이
있듯이, 먼 거리를 가는 버스도 휴게소를 들르듯이, 바쁜 업무에 휴가가
있듯이 잠시 멈추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더 멀리, 더 높이, 더 빨리
가기 위한 준비의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잠시 쉬어가라는 위로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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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내 멍에는 편하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7월14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 마태 11,28-30

내 멍에는 편하다.

‘하던 일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던 일을
남이 권하면 오히려 안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면 신이
나고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면 똑 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이 들고 능률도 떨어집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신이 나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옳은 일이고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11,28.3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더군다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명함으로써 우리에게 멍에와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결국 그분의 멍에와 짐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짊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육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드셨겠지만 사랑의 극진한 표현이었기에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셨고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충실히 감당하면 짐과 멍에는 가볍고 편하게
됩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규정이라는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에게 짊어
지게하고 내용보다는 형식에 매여 백성을 힘들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의미와 내용을 자발적으로 지키고 또 가르침으로써 편한 멍에와
짐이 되게 하셨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상당히 많았는데 248조항이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금령으로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조항의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였고 그 두 계명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더 힘든 요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그
멍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요한5,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일상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과 한계, 죄스럽고 못난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멍에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 안에서 오는
위로와 평화의 원천입니다. 기쁨을 위한 희생과 봉헌의 기초입니다. 혹
힘들고 지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정령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신 주님을
꼭 붙잡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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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사랑에 목말라 하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되시면서 우리의 목마름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의미에서 목마름이 아니라 충만한 생명, 악과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롭게 풀려나는 생명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또한
육화를 통해서 하느님은 한 인간, 나자렛의 예수 안에 당신의 목마름을
태우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을 목말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우리 사랑에 목말라
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목마름은 예수님 안에서 타오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 안에서 인간적 목마름과 신적 목마름이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이 갈망은 이 목마름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수난 전날 성자께서 성부께 드린 기도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21)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모든 이들의 일치를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악마는 분열의 아비이고 항상 갈라놓고 항상
싸움을 일으키며 많은 악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목마름이 또한
우리의 목마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삼종기도 2015년 1월 25일).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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