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세마성당 11월 영적독서 「관계 속의 인간」

작성자 : 글라라    작성일시 : 작성일2019-12-09 13:07:30    조회 : 208회    댓글: 0
세마 성당 2019. 11월 영적도서 : 「관계 속의 인간」The Bible and the Human 8
 
 
지은이 : 송봉모 신부
예수회 신부. 로마 성서대학원에서 교수 자격증을 받고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에서 신약주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약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에 성서와 인간 시리즈, 성서 인물 시리즈, 요한복음 산책 시리즈와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예수-탄생과 어린 시절」,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을 위한 The Lord Calls My Name, Wounds and Forgiveness 등이 있다.
 
나눔의 글

"한몸 공동체로서 부부가 늘 일치하려면 부부가 함께 하느님께 기도드릴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부부가 늘 일치할 수 있는 첩경이다. 부부의 기도는, 두 사람을 만나도록 운명지으셨고 두 사람 사이에 사랑으로 머무시는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는 행위다. 하느님께 부부가 함께 의탁할 때 어찌 부부 사이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 「관계 속의 인간」 본문에서 -
이 책은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 여덟 번째로써, 수많은 부부가 겪고 있는 결혼생활의 위기를 다루고 있으며 이들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극복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의 성서 말씀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 대로 창조되었기에 인간도 하느님처럼 관계적 존재이며, 관계를 통해서 완전한 존재가 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과 타인, 하느님과 관계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친밀한 관계 경험 없이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 의도대로 온전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책에서 송신부님은 결혼한 부부 중 40%가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는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성차별과 자라난 환경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이는 무조건 덮어 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서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부부 사이에 하느님이 계시도록 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은 부부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치관과 이념 그리고 삶의 목표를 제공함으로 동반과 관계를 강화시킨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 책은 부부생활을 시작하는 젊은 부부들과 권태기를 맞고 있는 부부뿐 아니라 성인이라면 누구나 올바른 부부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또한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부터 새로운 시각을 형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1
남녀 창조의 근본원리와 그릇된 성차별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사람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이하 생략.........”(창세 1,26-28)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인간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중요하다.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곧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다는 말이다. 남자와 여자는 태초부터 함께 태어났기에 둘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성차별을 주장하는 이들은 여자는 남자보다 나중에 태어났고, 그것도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으며 여자가 생긴 이유도 남자를 돕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열등하다는 것이다. 먼저 관련된 성서 구절을 읽어 보자.
 
“야훼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 주리라 하시고는,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하나하나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다주시고는 그가 무슨 이름을 붙이는가 보고 계셨다. .......이렇게 아담은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이름을 붙여 주었지만 그 가운데는 그의 일을 거들 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시고는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다음, 아담에게 데려오시자 아담은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르리라!’
이리하여 남자는 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몸이 되게 되었다. .....이하 생략”(창세 2,18. 21-25)
 
성차별론자들이 여자를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보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이다. (1) 여자는 남자보다 늦게 창조되었다. (2) 여자는 남자를 돕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3)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 (4)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5) 여자로 인해서 원죄原罪가 이 세상에 들어왔다.
이 다섯 가지를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과연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인가를 증명해 보자.
 
(1) 여자가 남자보다 나중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열등한 존재인가? 여자가 아담 · 동산 · 나무 · 동물들이 다 만들어진 다음에 창조되었다고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볼 수 없다. 통상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인간이 제일 나중에 창조된 것은 인간이 창조의 정점頂點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맨 나중에 창조된 여자는 창조의 절정이요, 남성보다 탁월한 존재로 간주 되어야 할 것이다.
 
(2) 여자는 남자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남자를 돕기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열등한 존재인가? 여자가 남자를 돕는 존재이기 때문에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한다면 하느님이 인간을 돕는 분이시라고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아니다. 아담을 돕기 위해서 먼저 창조된 새와 들짐승이 아담에게 적당치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은 동등한 존재인 여자를 지은 것이다.
 
(3) 여자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인가? 만약 그렇다면 아담은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흙보다 열등한 존재인가? 굳이 자료의 우월성을 가지고 보자면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나은 자료로, 더 많은 정상으로 만들어졌다. 남자는 흙과 먼지에서 창조되었지만, 여자는 뼈와 살로 창조되었다. 또 남자 창조 이야기는 딱 한 구절로 묘사되지만 여자 창조 이야기는 무려 여섯 구절로 묘사되고 있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여자가 나왔다는 것은 둘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4) 아담이 여자에게 이름을 지어주었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인가? 하지만 성서 어디에도 남자가 여자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말은 없다. 다만 “여자라고 부르리라” 했을 뿐이다. 아담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르리라.” 한 것은 이름을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배필로서 여자를 발견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아담이 첫 에로스를 느끼면서 외친 기쁨의 소리다.
 
(5) 여자로 인해서 원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대접받아야 하는가? 흔히 하와가 유혹해서 아담이 죄를 짓게 된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뱀이 하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때 아담은 어디에 있었는가? 창세기 3장 6절에서 뱀과 하와의 대화가 끝나고 하와가 금지된 과실을 따먹는 장면을 보면 아담이 처음부터 하와와 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담은 하와와 뱀이 이야기를 나눌 때 말없이 듣고만 있었던 것이다. 아담의 침묵은 하와의 의견에 대한 동의로 보아야 한다. 동의가 있었기에 하와가 과일을 내밀었을 때 아담은 거절하지 않고 받아 먹은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창조 이야기에는 성에 대한 차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엄청난 성차별이 존재하는가? 여성을 노동력의 하나로 간주하였기에 경제력이 허락되는 만큼 일부다처제를 이용하여 아내라는 이름으로 노동력을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차별은 인간의 역사가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 정신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힘의 역사를 따랐기 때문이다.
 
1세기, 팔레스티나의 성차별은 매우 심해서 여자들은 회당 구성원에 끼지 못하였고, 안식일 규범도 적용되지 않았다. 여자들은 토라를 배울 수도 읽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초대교회 모든 이가 여성 차별적 태도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예수님과 바오로는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의 남성 문화권을 뛰어넘는 인본주의자로서 여성을 인격적으로 대했다. 예수님은 남녀관계를 창조의 근본원리로 끌어올리신다. 그는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라 선언하였고(마태 21,31), 당대 랍비들과 달리 여성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면서 그들을 가르쳤고, 제자로 삼으셨다.
 
바오로도 예수님을 본받아 여성을 인격적으로 대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갈라 3,28) 그런가 하면 많은 여성을 선교 동지로 삼기도 했다. 최초로 그리스 땅에서 신도가 된 리디아는 훗날 티아디라 교회를 개척하였고, 바오로의 2차, 3차 선교여행에서 가장 믿음직한 동료였던 브리스킬라는 에페소 가정교회와 로마 가정교회를 세운 여성이다. 또 바오로가 개척한 고린토 교회에는 클로에란 여성이 지도자로 있었고, 겐크레아 교회에는 페베란 여성이 지도자로 있었다.
 
 
2
결혼의 영성
 
친밀한 사랑을 주고 받게 만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인간의 性的특성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창세 1,26-27). 그러니 남성과 여성이 서로 상대방의 性에 매혹되는 것은 고상한 것이요, 자연스런 것이다.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신 하느님은 아담이 잠에서 깨어나자, 하와의 손을 잡고 남자에게 데리고 온다. 그러자 남자는 여자를 향해 소리친다. “(이자는)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기쁨과 설레임에 가득차서 여자가 자기의 짝임을 깨닫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이성에 눈이 뜨이면서 말해주지도 않는데 즉시 “이 사람이 바로 내 사람이다.” 하면서 자기 짝을 감지해 낸다. 이는 남녀 사이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사想似 사이임을 가리킨다. 서로가 자기의 유사한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남녀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상사想似와 상사병相思病은 그 뿌리가 하느님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왜 인간에게 상사와 상사병을 허락하시는 것일까? 남녀의 상사가 하느님의 뜻이라면 결혼도 당연히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의 뜻이기에 사람은 나이가 차면 반려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진리를 체험한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할 때에는 내재적인 완전함이 형성된다. 나의 배우자는 나의 부족함을 채워준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며 나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반려자가 필요하다.
 
왜 예수께서는 첫 기적을 젊은 연인들이 가정을 이루는 혼인 잔치에서 행하셨을까? 예수께서는 젊은 연인들이 행복한 부부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축복해 주기 위하여 혼인 잔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본질에서 창조되었으며 서로 돕는 짝으로 창조되었기에 상사적인 사랑을 갖는다. 그러니 둘이 결합하여 한몸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맥락에서 성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리하여 남자는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한몸이 된다.” 이 구절은 결혼이 무엇인지, 결혼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세 가지 측면에서 알려준다. 그것은 떠남, 결합 그리고 한몸이 됨이다.
 
떠나서
떠나는 행위는 결혼이 성립되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법적 행위이다. 인간은 두 차례 부모를 떠난다. 막 태어나 탯줄이 잘릴 때 그리고 결혼으로 정신적 탯줄이 잘릴 때이다.
사실 자신의 뿌리이며 든든한 방패막이였던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기의 탯줄을 끊는 데는 30초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적 탯줄을 끊는 데는 30년도 더 걸린다.
 
신혼부부들이 부모를 떠났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떠나지 못한 경우 중 하나는 무의식적으로 고정된 부부 역할이다. 성장 과정에서 보고 배운 부모의 부부생활을 통하여 “남편은 이래야 되고, 아내는 이래야 된다.”는 고정된 역할분담이다. 이렇게 고정된 부모 역할을 갖고 살아가는 부부들은 바람직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한다. “미리 정해진 역할을 갖고 살아가다 보니 로봇처럼 사는 것이다. ”
 
결합하여
부모에게서 떠나야 진정한 부부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결합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동사 바카드는 ”‘달라붙다’라는 의미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결합을 가리키는 이 동사는 본시 계약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결합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된다. 이 동사가 부부간의 결합에도 쓰여진 이유는 명백하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약속이 중단 없이 이루어지듯이 배우자를 향한 결혼 서약도 영원하다는 것이다.
 
혼인성사를 통해서 결합된 부부는 하느님의 이러한 신적 사랑을 본받아서 배우자에게 같은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 이렇게 신성한 서약으로 결합된 부부는 ‘죽음보다도 강한 사랑’에 초대된 이들이다.
 
부부간의 결합과 의존이 건강하고 바르게 이뤄지기 위해서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결합한다고 해서 각자의 인격을 없애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나이고, 내가 당신”인 것이 아니다. 부부는 짝으로서 일치하지만 그 일치 안에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한다.
 
덩굴식물이 잘 자라는 식물을 휘어 감아 숨 쉬지 못하게 하듯이 지나치게 의존적인 부부관계는 서로를 조여 결국 파국으로 몰고 간다. 부부의 결합은 나무와 같다. 나무가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밀집되어 있으면 크게 자랄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부부생활은 마주보기보다 한 곳을 함께 바라보면서 걸어가는 삶이다.
 
한몸이 된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것은 혼인의 마지막 조건이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육체적인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부의 性的 결합은 육체적 결합은 물론 정신적 · 영적으로 갈림이 없는 일치를 말한다. 육체적 · 성적인 일치는 두 사람의 심리적 · 영성적 일치가 시작되었음을 상징한다. 긴 세월 동안 함께 살아온 부부는 마치 오누이처럼 느껴진다.
 
떠남과 결합 그리고 한 몸이 됨은 혼인성사의 신비를 드러내기 위해서 꼭 있어야 되는 기본 요소들이다. 트로비쉬는 결혼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안에 자녀가 포함되지 않음을 강조한다. 자녀는 결혼의 필수조건이 아니다. 자녀는 가정의 완전꼴을 형성해 주지만 필수꼴은 아니다. 자녀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주어진 것이지 혼인의 필수조건이 아닌 것이다.
 
결혼을 구성하는 본질 요소에서 자녀가 빠졌다는 것은 또 다른 가르침을 준다. 그것은 부부관계가 자녀 관계보다 더 중요하고 밀접한 관계라는 것이다. 사람은 부모보다 배우자를 더 그리워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부부관계는 무촌이고 자녀와의 관계는 1촌이다. 내 배우자가 내 자녀보다 더 귀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자녀들 편에서도 부모 서로 간의 사랑을 통하여 사랑을 받는 것이지 부모끼리 서로 소원疏遠하다면 자녀들은 제대로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하느님은 인간을 性的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러니 부부 사이의 성적 결합은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다. 최초의 부부는 벌거벗은 채로 있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교회는 부부가 성에 대해 생각할 때 부끄러워하게 만들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결혼한 사람은 그들이 누리는 삶의 형태를 생각할 때 얼굴이 붉어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부부는 출산을 위해서만 성교를 해야 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창세기는 부부 사이의 성적 결합의 목적을 출산은 물론 부부가 한몸이 된다는 점에도 두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고 있으면서 서로의 약점과 한계성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상호 간의 깊은 사랑과 신뢰의 옷을 입고 있었기에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고, 깊은 이해와 사랑 속에서 보호받고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3
사랑의 기술
 
남녀 간의 차이를 알고, 받아들이고, 감사드리기
그런데 결혼생활을 해갈수록 부부가 서로 알몸이 되지 못하고 덧옷을 입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밀월 기간이 지나가면서 배우자가 나의 벌거벗은 부분을 감싸주기보다는 비난하고 공격하기 때문이다.
 
인생길에 나를 보호해 주어야 할 배우자가 나의 약점들을 공격하고 생채기를 내게 되면 비극은 일어난다. 배우자가 나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건드리고 모욕하면 상처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준 상처는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다.
텐니브(Dorothy Tennyv)는 사랑에 빠질 때 나타나는 현상, 즉 연애 현상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심리학자이다. 그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아무리 천생연분의 부부라해도 결혼한지 평균 2년이 지나면 상대에 대한 설레는 감정이 점차 식으면서 상대의 벌거벗은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못한다고 한다.
 
부부 사이에서 갈등을 초래하는 요소는 서로 다른 행동 양식과 가치관이다. 모든 차이들이 연애 시기에는 다 포용 되는 듯하더니 시간이 가면서 걸리적거리는 것이다. 연애 시기에는 눈에 뜨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하나 보이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체험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기에 어떤 삶은 사랑에 빠지는 감정을 ‘열병’ 또는 ‘생리적인 사랑’이라고 부른다. 참사랑과 구분하려는 것이다.
 
행복한 부부는 행복해지기로 결심한 부부이다. 이런 부부는 자기들 사이에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알지만 서로의 벌거벗은 몸을 돌보아 주면서 행복하게 살기로 결심한 이들이다.
 
결혼 서약을 주고받을 때 결혼 당사자들은 의지적 사랑을 약속하지 감정적 사랑을 약속하지 않는다. 낭만적 사랑의 감정은 어느 순간에는 사라져 버릴 일시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을 갖고서 신성한 약속을 할 수는 없다.
 
배우자를 이해하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이다. 첫째는, 배우자의 성장배경을 이해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배우자가 나와 다른 性으로서 갖고 있는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이해하라는 것이다.
 
상대를 한결같은 사랑으로 품어주겠다고 결심하고 결혼했어도 상대의 성장 환경이 어떻게 나와 다른지를 알지 못한다면 결혼 초에는 “당신 없이는 못 살아!” 하면서 살아가지만 시간이 지나면 “당신 때문에 못살아!” 하면서 아우성칠 것이다.
 
배우자에 대해서 이해해야 되는 두 번째 요소는 배우자가 나와 다른 性으로서 지니고 있는 가치관과 행동 양식이다. 배우자가 나의 性에서 나온 존재론적인 차이를 모른다는 소리다. 남자와 여자의 행동양식과 가치관이 얼마나 다른지 아는 사람은 적다. 우리가 남자와 여자의 존재론적 차이를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어느 부부가 남녀 간의 차이를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그 차이를 무시한다면 둘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질 리가 없다. 조그만 일에도 긴장과 충돌이 일어난다. 그러니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배우자와 나는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같은 사건 앞에서 남자와 여자의 반응이 다른 것은 그들의 존재 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남성적이다라는 말은 남성의 독립적 경향(independence)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남성은 성취 중심의 행동양식을 갖는다. 남자는 목적을 성취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자연히 이성에 바탕을 둔 ‘보고용 대화(report-talk)’가 된다.
 
반면 여성적이다라는 말은 여성의 친밀성 경향을 가리킨다. 그래서 여성은 관계 중심( relationship oriented)의 행동 양식을 갖는다. 여성은 친밀함을 중요시하고 공감대 형성에 초점을 맞추기에 그들의 대화는 자연히 감정에 바탕을 둔 ‘관계를 위한 대화(rapport-talk)’가 된다.
 
물론 모든 인간은 남자든 여자든 다 독립성과 친밀성의 경향을 갖고 있고 목적 중심과 관계중심의 행동양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에 있어서 남자는 독립성과 목적 중심으로, 여자는 친밀성과 관계중심으로 크게 치우쳐 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결혼 이후에 더 분명히 드러난다.
 
신경학적으로도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대뇌 생리학자들이 입증하고 있듯이, 남자는 주로 왼쪽 뇌가 발달 되어 있고 여자는 오른쪽 뇌가 발달 되어 있다. 왼쪽 뇌는 논리적 합리적 사고방식을 하는 뇌이고, 오른쪽 뇌는 느낌이나 감정 · 직관을 다스리는 뇌이다.
 
남자들은 결혼을 하고 나면 가정 밖으로 나가려는 경향이 있고, 반대로 여자들은 가정에 머물러 있으려는 경향이 있다. 남자들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 투쟁하는 경향이 있지만, 여자는 보금자리를 가꾸고 자녀를 키우는 일에 마음을 쓴다. 여기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결혼의 승패는 한마디로 상호 독립성과 상호 의존의 조화 여부에 있다. 구체적으로 여자는 남자의 독립성과 성취 중심의 경향을 이해하지 않거나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고, 남자는 여자의 친밀성과 관계중심의 경향을 이해하지 않거나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자가 자기중심으로 행동하고 고집하기 때문에 충돌이 생기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의 독립성 경향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점을 존중해 주지 않으면 남자에게 결혼생활은 속박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독립과 자율적 공간을 필요로 하고, 그 공간을 가질 때 적극적으로 살아갈 의욕과 힘과 열정이 생긴다. 남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영어로 표현하면 ‘I need you’이다. 남자는 여자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것보다도 여자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이 말은 여자로부터 신뢰와 인정을 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한편 친밀한 관계중심으로 사는 여자가 가장 살맛을 느낄 때는 남자로부터 관심받고 이해받을 때이다. 남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는 여자가 이야기 할 때 경청하지 않는 것이다. 심리학자 투르니에( Paul Tournier)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의 말을 경청하고 중요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이해받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적어도 한 사람에게서라도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 없이는 누구도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성장해 나갈 수 없으며 충만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남자가 흔히 저지르는 또 하나의 실수는 여자가 자기 문제를 이야기할 때 성급히 해결책을 제시하는 점이다. 여자가 마음속의 문제를 남자에게 말하는 것은 나누고 싶어서이다. 남자더러 어떤 결정을 해달라는 소리가 아니다.
 
남자가 흔히 저지르는 또 하나의 잘못은 여자의 느낌 세계, 특히 부정적 느낌의 세계를 뜯어고치려는 것이다. 여자들은 삶이 힘들면 힘들수록 여러 가지 부정적 감정들로 시달린다. 이때 남자가 여자의 복잡한 감정 세계의 감을 잡지 못해 짜증을 내거나, 그 감정을 뜯어고치려 한다면 여자는 절망감을 느낄 것이다.
 
여자들은 자주 무드(mood)가 바뀌고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왜 여자들은 남자보다 감정적 변화가 심할까? 그 까닭은 이성적으로 말하자면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섬세하고 감정이 더 발달 되어 있기 때문이고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남자는 독립성의 욕구가 채워지기를 원하고, 여자는 친밀성의 욕구가 채워지기를 원하는데, 다른 것으로 채워주려 한다면 어떻겠는가. 남자는 독립성을 원하고 여자는 친밀성을 원한다는 사실을 얼마나 이해하고 존중하는가 하는 것이 결혼생활의 승패를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아가 단순히 남녀 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서 끝나지 아니하고 그 차이를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드러내놓고 성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감사하는 부부는 불화를 크게 줄일 수 있다.”
 
결혼이란 인생에 있어 가장 아름답고 인간을 향한 끝없는 투신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가장 인내와 희생을 요구하는 장거리 경주이다.
 
제대로 싸우기
부부가 아무리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그 차이를 감사드린다 하더라도 부부간의 갈등은 피할 수 없다. 갈등은 친밀한 관계에서는 더더욱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 :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이란 책을 쓴 페로트 부부는 행복한 결혼을 이루는 비책祕策은 “부부간의 갈등이 생기면 상처를 남기지 않고 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공정하게 싸우는 것이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비책이어서, 그대로 적용한다면 백발백중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사랑만으로 결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없다.
 
신혼부부는 세 가지 원자재를 갖고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첫 번째 원자재는 서로가 공유하는 자료, 두 번째는 상호 보완적이면서도 서로가 다른 자료, 세 번째는 전혀 보완적이지 않은 다른 자료이다. 이 중 세 번째가 부부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자료이다.
 
많은 부부가 갈등을 다루는 법을 모른다. 어떤 부부는 침묵하는 것이 가장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최선의 길이라 생각하여 갈등이 생기면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덮어둔다. 이러한 부부는 갈등이 결혼생활의 자연스런 한 부분임을 모른다. 갈등을 억누른다고 갈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서는 갈등을 덮어버리기보다 직면하고 제대로 싸워야 한다.
 
그렇다면 제대로 싸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싸움거리를 조심스레 선택할 것. 둘째, 갈등의 문제를 명확히 할 것. 셋째, 적절한 때를 찾아 싸울 것. 넷째, 좋은 의도와 솔직함 그리고 나 - 전달법으로 싸울 것.
 
부부 싸움의 요소는 부부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것들 그리고 상대의 태도 변화가 가능한 문제여야 한다. 사소한 갈등을 갖고 싸우기보다는 사소한 갈등 이면에 억눌려 있는 진짜 싸움의 요소를 찾아내 싸워야 한다.
 
싸울 때에는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서로 명확히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화가 난 것보다는 왜 화가 날 수밖에 없었는지, 화가 난 진짜 원인을 알아야 한다. 부부가 싸우면서도 어디에 갈등의 소지가 있는지 모른다면 싸움의 에너지는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부부간의 일치는 깨질 것이다. 통교란 내가 하고 싶은 말만 쏟아붓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내 말을 이해할 때 비로소 통교가 된 것이다. 부부가 싸우는 것은 통교하기 위해서다.
 
아무 때나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슨 대화든지 적절한 때가 있듯이 싸움도 적절한 시기가 있다. 일반적으로 갈등이 일어났을 때 바로 대화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지만 적절한 상황이 아니면 다음으로 미루어야 한다.
 
싸울 때는 의도가 좋아야 한다. 상대를 아끼는 마음 없이 싸운다면 그것은 싸움을 위한 싸움, 파괴를 위한 싸움일 뿐이다. 관계 개선을 위해 제대로 싸우려면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나-전달법’으로 싸워야 한다. ‘나-전달법’은 ‘나’를 주어로 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나를 주어로 하는 것은 감정 표현이 파괴적으로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너-전달법’을 쓰게 되면 배우자는 비난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즉시 방어 태세를 취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해하기보다는 변명과 방어를 하게 되며 큰소리를 지르게 된다. 하지만 ‘나-전달법’을 쓰게 되면 상대방이 자신의 허물을 객관적으로 보고 나의 아픔에 동참하게 된다.
 
제대로 싸우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파괴적인 싸움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어떤 식의 부부 싸움이 결혼생활을 파경으로 이끌어 가는지 갈등을 겪는 많은 부부들을 임상실험했던 심리학자 고트만(John Gottman)은 부부 싸움에서 분노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어떤 부부가 서로 소리지르며 싸운다 하더라도 상대를 비난하고 멸시하는 말만 하지 않는다면 그들 관계는 파경으로 치닫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트만에 따르면, 결혼의 일치를 깨는 요소들은 ‘비난 · 멸시 · 방어 · 담쌓기’이다. 제일 먼저 언급된 것이 가장 파괴적이고 제일 나중에 언급된 것이 덜 파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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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완성을 위한 결혼생활
 
하느님 앞에서 일치된 부부관계
앞서 우리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하여 남녀 간의 차이를 인식하고 수용하고 감사드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건전한 부부 싸움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무엇보다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부부가 하느님 안에서 일치해야 된다는 점이다. 최초의 부부 사이에 하느님이 계셨듯이 오늘날의 부부 안에도 하느님이 계셔야 한다.
 
오늘날 가정의 위기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빠진 데서 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생활과 하느님은 아무 상관관계가 없는 듯이 산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결혼을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로 하시려고 남녀가 서로를 그리워하고 결합하도록 하셨건만 정작 결혼한 당사자들은 하느님과의 일치는 없다.
 
많은 젊은이들이 배우자를 찾을 때 상대방이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단순히 같은 신앙만 갖고 있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어느 정도 신앙을 살아가고 있으며, 하느님 앞에서 겸허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상대가 정말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결혼한다고 사람이 바뀌는 것도 성격적 결함이 고쳐지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과의 일치가 없으면 부부 사이의 일치는 불가능하다. 한몸 공동체로서 부부가 늘 일치하려면 부부가 함께 하느님께 기도드릴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부부가 늘 일치할 수 있는 첩경이다.
 
부부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은 인간적 차원의 사랑을 넘어 존재 중심에서 나오는 사랑이어야 한다. 곧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세상에서 내게 가장 귀한 사람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을 배웠을 때 비로소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을 지금보다 더 잘 사랑할 수 있다.
 
배우자에게 존재 중심에서 나오는 사랑을 주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배우자의 영적 진보에 협력하는 것이다. 결혼생활에서 흔히 문제가 되는 것은 내적 고독과 영적 작업에 필요한 시간을 배우자에게 마련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적 성장이 중단되고 영적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삶은 무의미하게 흘러가게 된다.
 
아니마 아니무스의 통합을 위하여
하느님은 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한평생 같이 살기를 원하셨는가? 창세기 2장 18절에서 하느님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보아 그를 도울 짝을 만들어 주고자 여자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것은 인간이 홀로는 불완전한 존재이고 반대되는 性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가르침이다.
 
분석 심리학에서는 남성을 아니무스, 여성을 아니마라고 한다. 말하자면 “저 사람 참 남성적이다.” 할 때 ‘남성적인 모습’의 아니무스를 가리키고, “저 사람 참 여성적이다.” 할 때 ‘여성적인 모습’의 아니마를 가리킨다. 남성적인 심리는 행동성향이 외향적이고 능동적이며, 외부세계와 관련해서 경쟁적이며 통솔과 지배적인 욕구를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반면 여성적인 심리는 행동성향이 내향적이고 수동적이며, 외부세계와 관련해서 섬세하고 온유하며 생명을 돌보는 경향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아니무스는 과학을 발달시키고, 아니마는 예술을 발달시킨다.
 
그런데 남성이라고 해서 100% 남성적이고 여성이라고 해서 100% 여성적이지는 않다. 바로 이 적게나마 지니고 있는 반대되는 성을 배우자를 통해서 성장시켜야 한다. 남성은 아내를 통해서 자기 안에 열등한 존재로 남아있는 여성적 요소인 아니마를 성장시켜야 하고, 여성은 남편을 통해서 자기 안에 열등한 존재로 남아있는 남성적인 요소, 아니무스를 성장시켜야 한다. 자기완성을 위해서는 아니무스적 특징과 아니마적 특징이 한 인간 안에서 개발 · 통합되어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남성은 감정과 직관을 개발하고, 온유함 · 자애로움 · 섬세함 · 생명을 돌보는 마음을 개발해야 한다. 한편 여성은 사고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키우고, 객관성 · 합리성 · 질서 · 통솔 그리고 경쟁하는 마음을 개발해야 한다.
 
왜 자기완성을 위하여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통합이 필요한가?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아니마와 아니무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창세 1장에 나오는 인간 창조는 양성구유자로서의 인간 창조이고, 창세 2장의 인간 창조는 남자와 여자라는 두 性의 창조라고 말하였다. 순서대로 얘기하면 태초의 인간은 자기 몸 안에 남성과 여성을 다 소유하고 있었으나 후에 두 개의 몸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랍비 사무엘 베 나흐만이나 랍비 레위에 따르면 처음 인간은 한몸을 서로 나누고 있었다. 앞면에는 남성의 얼굴과 몸이, 뒷면에는 여성의 얼굴과 몸이 있었다. 나중에 이 양성동체는 반으로 나뉘어져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되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자기 몸 안에 남성과 여성을 다 지니고 있던 아담은 하느님의 이미지를 담고 있었고 하느님의 모상 안에서 충만된 생명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로 분리 창조되었다는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더 이상 하느님의 이미지나 모상이 언급되지 않는다.
 
인간이 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반쪽, 즉 반대되는 성을 자기 안에서 개발 · 통합시켜야 한다. 그런데 남성과 여성의 특성(아니무스와 아니마)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스런 투쟁과 같다.
 
나와는 다른 경향과 가치 세계를 가진 배우자를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인내하면서 통합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성스럽다는 영어 단어 holy는 전체를 나타나는 whol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성인들이 성스러운 것은 그들의 삶과 행위가 통합된 인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술가나 문학가가 통합된 인격을 갖추었다면 그 사람은 인간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걸작품을 만들어 낼 것이요, 정치가나 사업가라면 탁월한 정치, 역량 있는 사업을 펼칠 것이다. 그 사람이 거지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마음껏 자기 생을 즐기다 하늘로 돌아갈 것이다.
 
“모든 것은 서로 짝지어 마주 있으며,
서로 도와서 훌륭하게 된다.”
(집회 42, 24-25)
 
혼자서 애를 쓰는 것보다 둘이서 함께하는 것이 낫다.
그들의 수고가 좋은 보상을 받겠기
때문이다.
넘어지면 일으켜 줄 사람이 있어 좋다.
외톨이는 넘어져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어
보기에도 딱하다.
그뿐이랴!
혼자서는 몸을 녹일 길이 없지만
둘이 같이 자면 서로 몸을 녹일 수 있다.
혼자서 막지 못할 원수도
둘이서는 막을 수 있다.(전도 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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